전북 익산시 황등면 황등리에 있는 황등성당의 현재 모습. 필자의 부친이 공소를 운영했던 집터를 기부해 1959년 건립됐다. 당시 신학교생으로 직접 블록을 만들어 본체 건물을 지었던 필자는 66년 12월16일 사제 서품을 받고 이튿날 이곳에서 첫 미사를 집전했다.
문정현-길 위의 신부 2
나는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잘 노는 편이었다. 자치기, 팽이치기, 딱지치기를 잘했고, 동생들한테 팽이나 딱지 같은 것을 곧잘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둘째라서 그런 건지, 정이 많은 성격 때문인지 동생들에게 배려를 많이 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어른들에게 인정이 많다, 부지런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그러나 한번 고집을 피우면 쉽게 꺾질 않았다. 집에서는 형이 하는 건 나도 끝까지 하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내가 형을 졸졸 쫓아다니는 게 귀찮았던지 하루는 형이 나를 떼놓기 위해 어딘가 나가려고 부엌에 가서 물항아리의 물을 바가지로 떠 마시니 나도 따라 마셨다. 그런데 바가지가 내 얼굴을 가리는 순간 형이 도망쳐 뒷간에 숨었다. 눈치 챈 나는 씩씩거리며 달려가 뒷간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화들짝 놀란 형은 발을 헛디뎌 그만 똥통에 빠지고 말았다. 물론 형은 내게 크게 성을 냈지만 끝내 나를 떼놓지는 못했다. 나는 집에서나 밖에서나 그냥 평범한 아이였지만 고집만큼은 셌다.
초등학교 4~5학년 무렵의 일이다. 동네의 한 아이가 덩치도 크고 셌는데 내게 함부로 했다. 참다 참다 화가 난 나는 그 아이와 죽기살기로 맞붙을 요량으로 학교 가는 길목에 있는 나무 위에 올라가 그 아이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 아이는 같은 학년이라도 나보다 나이가 많고 컸기 때문에 처음에는 내가 맞았다. 그러나 다음날 다시 그곳에서 그 아이를 기다렸다가 싸웠다. 그렇게 한 달을 되풀이하니까 나중에는 그 아이가 제풀에 질려 영문도 모르는 채 무조건 잘못했다고 했다. 부당하다고 생각하면 쉽게 뒤로 물러서지 않는 성격은 그때부터 드러난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밖에서 아무나 붙잡고 싸움질을 한 건 아니다. 그때는 아마 그동안 당한 게 워낙 분하니까 죽기살기로 싸운 것 같다. 어머니는 밖에서 아이들과 싸우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으셨다. 우리 부모님은 가톨릭 신자다운 행실을 무척 중시하는 분들이었다. 동네 애들하고 놀다가 욕이라도 한마디 주워듣고 와서 무심코 욕을 따라하기라도 하면 그 욕을 어디서 들었느냐, 누구하고 놀았느냐를 하나하나 따져 물어서 혼을 내셨다. 어쩌다 화투장이라도 발견되면 이놈의 화투를 어디서 갖고 왔느냐, 어디서 쳤냐며 뿌리를 캐고야 말았다. 거짓말을 했다 하면 몇날 며칠을 혼이 나니 고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 어린 시절 신앙생활은 금기사항으로 가득했다. 기도 시간에 존 것이 왜 죄가 되는지도 모르면서 ‘아침기도에 졸았습니다’, ‘아침기도, 저녁기도 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거짓말했습니다. 욕했습니다’ 하고 고백성사를 해야 했다. 고역이었지만 꼭 해야만 하는 걸로 배웠으니 억지로라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왜 어른들이 그런 것들을 긍정적으로 가르치지 못했는지 아쉽다. 가장 힘든 것은 저녁기도 시간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과 돼지 똥집으로 축구를 하며 한바탕 신나게 놀고 와서 저녁밥을 먹고 나면 기도시간마다 잠이 쏟아졌다. 기도가 길기는 또 얼마나 긴지, 기도하고 연도하고 묵주기도를 하고 또 가정을 위한 기도를 하고 다시 마을 사람 누구를 위한 기도로 이어졌다. 십자가 밑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으면 고개가 저절로 툭툭 떨어졌다. 고개가 방바닥에 안 떨어지게 하려고 부득부득 기어서 벽에 이마를 대고 기도를 따라서 했지만 졸음을 참지 못하고 잔 적도 많았다. 그러면 어른들은 그걸 마귀가 들려서 그런 거라고 했다. 아침이 되면 부모님은 밭에 나가야 하니 새벽부터 식구들을 다 깨워 십자가 앞에 앉혔다. 아침기도 역시 그렇게 비몽사몽 상태에서 시작을 했다. 그래도 아침에는 기도를 하다 보면 점점 정신이 맑아져 괜찮았다.
기도 못지않게 힘든 것은 교리문답이었다. 우리 공소에 이리본당 신부님이 방문하는 성탄절이나 부활절이 다가오면 기도문과 교리문답을 달달 외워야 했다. 기도문이야 날마다 거르지 않으니 저절로 암기가 되지만 교리문답은 일부러 320조목을 다 외워야 하니 쉽지 않았다. 아버지는 공소회장인 당신의 자존심 때문에라도 그걸 다 외우라고 닦달했다. 엄격한 가정교육 때문에 가끔 왜 이렇게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 고생을 하나 싶기도 했지만, 어린 마음에도 기도하고 착하게 사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는 부모님을 존경했다.
구술정리/김중미 작가
문정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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