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첫 부임지인 전북 순창성당 시절 이기순 신부가 사준 독일제 중고 오토바이를 타고 전교활동을 다니던 필자, 뒤에 탄 사람은 전주 전동성당의 성심유치원 교사였는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문정현-길 위의 신부 8
1966년부터 2년 동안 전주 전동성당에서 보좌신부로 있을 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알리기 위한 교구 차원의 연수회가 많았다. 지금도 기억나는 연수 내용 가운데 하나는 ‘교회는 민중의 지도자이기보다는 그 나라의 민중들 속에 들어가,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고, 그들의 삶을 이해하면서, 그들과 함께 사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낯설고 충격적이기까지 했던 바티칸 공의회의 새 정신이 내 삶과 일치하게 되기까지는 이후로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때 전동성당의 본당신부는 김종택 신부님이셨는데 ‘가톨릭 노동청년회’(JOC) 지도신부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도 제이오시 일을 가끔 도왔다. 원래 제이오시는 관찰·판단·실천을 통해 노동자 자신과 삶의 현장을 복음화하는 일에 몸을 바치는 투사의 길을 지향했지만, 당시에는 회원 가운데 우체국·은행·작은 기업체의 직원이 많아서 노동자의 권익투쟁보다는 가톨릭 신자들의 모임 같은 성격이 더 컸다.
그러다 제이오시가 노동조합 운동에 깊숙이 참여하게 된 것은 강화도 심도직물 사태였다. 67년 5월 심도직물에 합법적 노동조합이 결성됐다. 강화본당의 청년회 회원들이 주축이 되었고, 주임신부였던 전 미카엘 신부(메리놀외방전교회)가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그런데 당시 국회의원이기도 했던 심도직물 사장은 노조를 만든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미카엘 신부를 노동자를 선동한 용공분자라고 비난했다. 처음에는 노동자들과 교회 안에서 갈등이 일어났지만 그 뒤 다른 종교계도 함께 연대해 대응했다. 심도직물 사태를 교회를 통해 들었던 나는 “그래 노동자도 자신의 권익을 위해 싸울 수 있지” 하는 정도로만 생각했다.
전동 보좌 생활을 마친 뒤 68년 순창성당으로 부임했다. 순창본당은 전주교구에서도 가장 가난하고 어려운 곳이었다. 그 전까지 원로 신부들만 있다가 새파랗게 젊은 신부가 오니까 성당에 한층 활기가 돌았다. 본당이 가난해 생활비도 거의 받지 못했지만 첫 부임 본당이니만큼 열정적으로 일했다.
그때까지도 특별한 사회의식이 없었던 나는 사회의 슬픔이 교회의 슬픔이고 사회의 기쁨이 교회의 기쁨이라는 공의회의 정신을, 병자들을 특별히 배려하고 흩어진 교우를 모으기 위해 가정방문을 많이 하는 방식으로 실천하고자 했다. 또 ‘가톨릭구제회’에서 보내오는 구호물자로 마을의 공동 제방을 쌓거나 저수지를 만들어 간접적으로나마 가난한 농민들에게 보탬이 되고자 했다. 순창은 지역이 넓어서 본당과 거리가 아주 멀었다. 구림, 복흥, 색동바위, 학선, 농바위 등 공소가 많아 관할 지역이 굉장히 넓고 가는 길도 험했다. 병자성사를 주기 위해서는 밤에도 고개를 몇 개씩 넘어 다녀야 했다. 그런 나를 보고 어느날 ‘아버지 신부’인 이기순 신부님이 전교 활동을 열심히 하라며 목돈을 주었다. 나는 그 돈으로 외국 신부가 선교용으로 구입해 쓰던 독일제 중고 오토바이를 샀다. 대중교통이 없는 지역의 공소 활동이 많았던 터라 유용하게 썼다.
그 무렵 6·25 때 죽은 학선 공소 신자들의 인적사항을 조사한 적도 있다. 전쟁 당시 회문산에 주둔했던 인민군이 천주교 신자 2명에게 공소에 보관되어 있던 제의를 입혀 총살시킨 사건이었다. 나는 교적에 이 사실을 기록해 증거로 남겼다. 증인들의 이름도 적었다. 공산주의가 교회를 탄압했다는 생각에 신자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순창본당을 떠난 뒤 일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는 모른다.
순창본당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부모님을 본당으로 초대하고 싶어 여비를 인편으로 보내 한번 다녀가시라는 연락을 전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안 오시고 돈만 다시 돌아왔다. 아버지는 “사제는 집안일 생각하지 말고 본당에서 신자들 생각해야 하는 거다. 마음은 고맙지만 당치 않다”고 말씀하셨다. 되돌아온 돈을 받고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부모님의 말씀이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닌데도 섭섭하고 아쉬웠다. 또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먹먹하다. 순창본당에서 의욕적으로 활동을 했기 때문에 후회되거나 아쉬움은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걸리는 것은 구호물자를 판 돈의 일부로 성당 담장을 수리한 것이다. 김후상 신부님처럼 단 한 푼도 성당을 위해 쓰지 말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구술정리/김중미 작가
문정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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