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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교회와 사회에 눈뜨게 된 필리핀 연수 / 문정현

등록 2010-06-10 18:53

1969년 필자(왼쪽)가 첫 부임지인 순창성당을 방문한 로마교황청의 한국주재 대사인 히폴리토 로톨리(가운데) 대주교와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무총장 김남수(오른쪽) 신부를 맞아 지역 순례길에 순창군청을 안내하고 있다.
1969년 필자(왼쪽)가 첫 부임지인 순창성당을 방문한 로마교황청의 한국주재 대사인 히폴리토 로톨리(가운데) 대주교와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무총장 김남수(오른쪽) 신부를 맞아 지역 순례길에 순창군청을 안내하고 있다.
문정현-길 위의 신부 9
1968년 무렵 어느날, 전주교구장인 한공렬 주교가 로마교황청의 히폴리토 로톨리 대주교를 초빙해서 교구내 시설 본당을 방문하는 길에 우리 순창본당을 찾아왔다. 나는 현황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그림표를 만들어 서툰 영어로 우리 본당을 소개했다. 그걸 좋게 보신 주교님은 교황대사의 장학금을 주선해 필리핀 연수를 보내주었다.

내가 연수를 간 곳은 필리핀에 있는 ‘극동아시아사목연수원’(EAPI)이었다. 그 연수원은 필리핀 케손시티에 있는 예수회가 운영하는 아테네오 데 마닐라 대학교 안에 있었다. 그 대학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세인트 조셉 교회와 착한 목자 수녀원이 운영하는 초등학교가 있었다. 유학비가 넉넉하지 않았던 나는 성 요셉 교회에서 기숙을 하며 미사를 맡아 용돈을 벌었다. 그리고 오후에는 착한 목자 초등학교 수업에 들어가 어린이들과 함께 영어를 익혔다.

연수의 목적은 아시아 교회의 재교육, 수련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따른 교회의 변화와 새로운 신학을 교육하기 위한 것이었다. 교수진은 예수회를 비롯해서 아시아권의 석학들이었다.

틀에 박힌 사제생활과 사제복에서 벗어나 민중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문화와 환경, 역사적 배경을 익히는 경험은 새로운 것이었다. 필리핀 민중의 문화와 환경, 역사적 배경을 익히면서 새로운 복음 전파는 원주민의 역사, 언어, 사회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사제의 임무는 신학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가진 한 사람으로서 민중의 문화를 배우고 익혀서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성직자는 지도자로서의 의미가 더 컸다. 공의회 이전에는 미사가 라틴어로 진행되다 보니 사제와 신자들 사이에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그 나라 말로, 사제와 신자가 제단에 둘러모여 성찬을 거행할 수 있게 되면서 둘은 한 몸이 되었다. 연수기간에 가장 깊이 느낀 것은 교회가 사회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였다.

그때 필리핀 빈민지역으로 현장체험을 자주 갔다. 특히 주민들이 쓰레기 더미 위에서 쓰레기를 주워 살아가는 ‘톤도’라는 동네에서 지낸 며칠간은 인상적이었다. 그곳에서 가난하고 소외받은 사람들, 혹은 정치적으로 억압받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한국에 가서 나도 그렇게 살아야지 하는 결심까지 하지는 못했지만, 우리 한국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더 배려하고 그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 지향을 갖게 되니 늘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이 눈에 보이고, 기도중에도 그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이웃 종교에 대한 생각도 바뀌었다. 이웃 종교가 어떤 배경으로 성장해왔고 어떻게 존재하는지 역사적·지리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이해하게 되면서 다른 종교와도 같은 관심사를 위해 함께 일할 수 있는 거구나, 그게 교회일치운동이 아닐까 생각했다.

필리핀에 있을 때 친하게 지냈던 사람 중에는 나이 많은 미국 수사신부로 일본에서 사목생활을 하던 분이 있었고, 또 한 사람은 신원회 출신의 독일인으로 파푸아뉴기니의 밀림지역에서 전교하던 사람이었다. 우리는 삼총사로 지냈는데 그들의 사목활동 경험을 듣는 것도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문정현 신부
문정현 신부
당시 필리핀은 18년째 마르코스의 독재정권 밑에 있었다. 학생들이 종종 거리에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시위하며 경찰과 대치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유신 군사독재로 야외집회를 거의 열 수가 없었기 때문에 거리시위는 난생처음 본 셈이었다. 그렇지만 그 시위가 내 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독재 치하의 사회격변기의 나라라면 으레 겪는 일이라고만 여겼다. 그때 내 고민은 사회적인 것보다는 사목자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더 많이 치우쳐 있었다. 그렇게 필리핀에서 연수를 마친 뒤 나는 영어권 나라로 가서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다. 그래서 주교님과 의논해서 유학 절차를 밟고 있는데 갑자기 전주교구 사정으로 돌아오라는 전갈이 왔다. 아쉬웠지만 72년 8월 귀국한 뒤 해성 중·고등학교 종교감으로 일했다.


구술정리/김중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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