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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문신부, 사람 좀 되라”던 전주교구장의 속뜻 / 문정현

등록 2010-06-14 20:31수정 2010-06-15 14:33

1975년 민청학련 구속자 석방운동을 하느라 서울에 올라와 머물렀던 명동성당 근처의 한 수도단체 기숙사에서 김지하 시인 어머니를 모시고 식사를 함께 했다. 왼쪽부터 서 있는 이가 지정환 신부, 그 앞으로 김 시인 어머니, 신현봉 신부, 최기식 신부, 필자.(왼쪽 사진) 74년 전국성년대회 강론에서 ‘반유신’을 선언한 김재덕 전주교구장.(오른쪽 사진)
1975년 민청학련 구속자 석방운동을 하느라 서울에 올라와 머물렀던 명동성당 근처의 한 수도단체 기숙사에서 김지하 시인 어머니를 모시고 식사를 함께 했다. 왼쪽부터 서 있는 이가 지정환 신부, 그 앞으로 김 시인 어머니, 신현봉 신부, 최기식 신부, 필자.(왼쪽 사진) 74년 전국성년대회 강론에서 ‘반유신’을 선언한 김재덕 전주교구장.(오른쪽 사진)
문정현-길 위의 신부 11
전주교구가 유신정권에 확실히 반대한다는 것을 교회 안팎에 선언한 계기는 1974년 10월9일 서울 혜화동 가톨릭대학교에서 열린 전국성년대회였다. ‘한국 순교자 현양을 위한 거룩한 해’를 기념하는 이 대회는 주교회의가 주최해 전국에서 사제와 신도 수백명이 운집한 큰 행사였다.

이날 강론을 맡은 전주교구장 김재덕(아우구스티노) 주교는 첫머리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 바오로 6세가 발표하신 성년선포 특별교서를 소개하며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정의에 대해 말했다. 김 주교는 “교회는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도처에서 전파하고 특히 궁핍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그리고 억압당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게끔 정의와 일치를 위한 일을 증진시키는 데 선도의 구실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유신헌법을 즉각 철회하고 군사재판을 중지하며 정치 수감자들을 전원 석방하고 함부로 비상대권을 남용하지 말라”고 선언했다. 또 권력과 돈을 좇는 교회를 향해 “우리 사제들은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하는데, 돈을 낚는 어부가 되어야겠느냐”고 일갈했다.

이날 김 주교는 베트남의 티우 정권, 필리핀의 마르코스 독재정권의 예를 들며 한국 현실을 걱정했다. 특히 5·16 군사쿠데타, 그리고 72년 단행된 이른바 10월유신의 비민주성을 비판했다. 이 강론은 보수 성향의 주교가 많았던 천주교계에 큰 충격이었다. 김 주교는 김수환 추기경, 지학순 주교와 서울 동성상업학교 16회 동기동창으로 사회의식이 뚜렷한 분이었다.

그날 대회에 앞서 전주교구에서 ‘사건’이 하나 있었다. 천주교계에 반유신의 기운이 번져가자 중앙정보부는 유화정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 하나로 도지사를 비롯한 전라북도 기관장과 전주교구 주교와 신부들을 불러 테니스대회를 열기로 했다. 그 소식을 들은 나는 김 주교를 찾아가 테니스대회를 하지 말자고 했다. 그러나 김 주교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화가 난 나는 이렇게 큰소리를 치고 나왔다. “제가 무슨 일을 벌여도 벌일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책임을 지십시오.”

테니스대회는 예정대로 열렸고, 사제들은 참여하지 않은 쪽과 참여한 쪽으로 갈렸다. 교구 내 성당 주임신부들을 그 지역 군수의 차량으로 모셔 오기도 했다. 나는 전주중앙시장에 가서 천을 떠서 잘 쓰지도 못하는 글씨로 “지학순 주교 석방하라”는 현수막을 만들었다. 그리고 벨기에 출신으로 임실치즈를 개발하고 있던 임실성당의 지정환 신부와 함께 테니스대회가 열리는 당시 삼양사전주공장 안의 코트로 갔다. 김 주교는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지 신부와 함께 “지학순 주교를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쳐댔다. 테니스대회는 중단이 되고 도지사, 경찰청장을 비롯한 각 기관장들과 대회에 참석했던 사제들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그들은 코트를 빠져나가면서 나를 외면하거나 미움과 저주의 눈초리를 보냈다. 나는 그 사람들을 하나하나 지켜보고 전주교구청으로 갔다. 마침 주교님 방에는 테니스대회에 참여했던 신부들이 와 있었다. 그들은 주교님을 만나고 나오며 나를 또 노려보았다. 모멸감을 참으며 주교 방으로 들어갔다. 김 주교는 몹시 화가 나 나를 보자마자 소리쳤다. “문 신부, 너 사람 좀 되라!” 나도 맞받아치고는 문을 닫고 나와버렸다. “사람 같지 않은 신부를 데리고 있는 주교님도 마찬가집니다.”

그날 온종일 어찌나 신경을 쓰고 고함을 쳤는지 현기증으로 쓰러질 지경이 된 나는 결국 전주성모병원에 입원을 하고 말았다. 병문안을 온 지 신부에게 김 주교와 논쟁한 이야기를 전했더니 그가 대뜸 이랬다. “그래, 너는 머리만 사람이고 몸은 원숭이구나.” 지 신부는 어디서 원숭이 사진을 가져다가 머리를 도려내고 대신 사람 얼굴을 붙여서 만든 액자를 내 침대 머리맡에 놓고는 놀려댔다.


문정현 신부
문정현 신부
사실 그날 일은 두고두고 후회가 됐다. 주교와 동료 신부들의 처지를 생각하지 못한 사려 없는, 과격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성년대회 이틀 전쯤 김 주교가 병문안을 왔다. 김 주교는 침대 위의 액자를 보더니 치우라고 했다. 속으로는 주교님이 찾아오신 게 반가웠지만 겉으로는 “사람 되라면서요”라며 불뚝거렸다. 주교님과 함께 왔던 교구관리국장 김영신 신부가 병실을 나서기 전 “주교님이 성년대회를 위해 큰 결단을 하신 것 같다”고 귀띔을 해주었다. 큰 결단이라는 것은 그날 강론에서 시국 발언을 하겠다는 의미였다. 나는 그길로 곧장 병원을 나와서 시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펼침막을 만들 천과 페인트, 그리고 대형 태극기를 샀다. 이튿날 대회에서 우리 교구 신부들과 나는 펼침막과 태극기를 펼쳐들고 거리로 나섰다.

구술정리/김중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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