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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함석헌 선생 편지’에 놀라 경찰 부른 교장 / 문정현

등록 2010-06-16 21:55

1972년 8월 필리핀 연수에서 귀국해 전주교구청 산하 해성중·고등학교 종교감으로 부임한 필자가 그해 교실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74년 전주에서 월요기도회를 열어 반독재 운동을 펼치는 필자를 체포하고자 경찰은 해성학교까지 진입해 수색했다.  <해성오십년사> 중에서
1972년 8월 필리핀 연수에서 귀국해 전주교구청 산하 해성중·고등학교 종교감으로 부임한 필자가 그해 교실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74년 전주에서 월요기도회를 열어 반독재 운동을 펼치는 필자를 체포하고자 경찰은 해성학교까지 진입해 수색했다. <해성오십년사> 중에서
문정현-길 위의 신부 13
1974년 여름 기독교회관의 목요기도회를 통해 사회의식이 성장한 나는 그해 가을 전주에서도 월요기도회를 열기 시작했다. 김영신·김봉희·김용태·박종상·박종근 신부 등 천주교 사제들과 화산교회 신삼석, 성광교회 김경섭, 남문교회 은명기, 난산교회 강희남 목사가 모여 전주 가톨릭센터에서 월요기도회를 열었다. 매월 첫째, 셋째 월요일에 모였다. 76년 내가 구속된 뒤에는 그 무렵 사제 서품을 받은 동생 문규현 신부가 더 열심히 참여했다.

75년 봄 어느날, 평소 알고 지내던 전주경찰서의 정보과 형사가 “혹시 ‘타도’라는 문건이 있느냐, 서울 중앙정보부 정보5국에서 문 신부를 연행하려 한다”는 귀띔을 해주었다. 나는 당장 종교감으로 재직하고 있던 해성학교를 나와 전주교구청으로 몸을 피했다. 교구청에 숨어 있자니 정보부 사람들이 나를 찾느라고 학교 교무실, 교실, 화장실까지 뒤졌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그즈음 학교와 내 사택은 경찰과 안기부 직원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 때문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문득 며칠 전 일이 떠올랐다. 전주 가톨릭센터 안에 있는 찻집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데 바바리코트를 입은 낯선 젊은이가 나타나 불쑥 문건을 내밀었다. 자기가 지하신문 <타도>를 만들고 있는데 읽어달라고 했다. 내용을 보니 반독재·반유신에 관한 것이긴 했지만 뭔가 이상해서 연탄불에 태워 버렸다. 나는 혹시 그 ‘타도’라는 문건이 다른 사람에게도 전달되지 않았을까 하고 임실성당의 지정환 신부를 통해 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문건이 추기경님 방문 앞에 놓여 있거나, 몇몇 신부들에게도 나와 같은 방법으로 전달이 되었다고 했다. 사제들이 거기에 휘둘리지 않아 사건은 확대되지 않고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지만 나는 지하신문을 만든다던 그 젊은이가 우리를 얽어맬 중정의 끄나풀이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런 일을 겪으며 박정희 독재정권에 대한 내 분노는 날로 쌓여갔다.

그 무렵 ‘유대희’란 해성고교 학생이 나를 잘 따랐다. 그 학생은 독재정권에 맞서는 내 활동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함석헌 선생님한테 편지를 썼고, 함 선생은 고맙게도 답장을 해주었다. 그런데 학교로 배달된 함 선생의 편지를 본 그 학생의 담임이 질겁을 해서는 그 편지를 교감과 교장에게 가지고 갔다. 교장은 그 편지를 경찰의 입회 아래 뜯어보았다. 그런데 막상 편지를 읽어보니 “공부 열심히 하고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라”는 정도였다. 경찰은 “고작 이런 일을 가지고 경찰을 부르냐”며 화를 내고 돌아갔다.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박정희 유신독재 시대는 인간의 양심까지도 파괴해서 선생이 제자를 고발하게 하는 동토의 세상이었다. 그 뒤 나는 천주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해성과 성심 중·고교 교사 연수를 할 때 그 사건을 상기하고, 유신독재의 부당성을 이야기했다.

그즈음 김지하 시인 석방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김지하가 쓴 ‘오적’, ‘고행’이란 시를 복사해 가지고 다니면서 학교 선생님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또 교도관을 통해서 밖으로 나온 김 시인의 양심선언문을 등사해 널리 퍼뜨리기도 했다. 원주에서 기도회가 열리면 먼 거리를 마다 않고 달려갔다. 그런 덕분에 박정희 대통령이 전북지역에 행차를 할 때마다 나는 연금상태가 되었다. 그래도 그때는 겁나는 게 없었다. 원주 기도회, 서울의 목요기도회, 전주의 월요기도회를 오가면서 경찰, 특히 정보기관과 맞섰다. 국민의 인권을 지켜야 할 경찰이 힘없는 사람들의 인권을 짓밟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문정현 신부
문정현 신부
주위에서는 한 치의 유보도 없이 싸우는 나를 걱정해 좀 부드럽게 적당히 맞서라고들 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유신 때만이 아니라, 훗날 전두환 정권 퇴진, 소파(한-미 주둔군지위협정) 개정 운동, 대추리에 들어가 싸울 때도 마찬가지였다. 가끔 ‘이러다 죽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적당히 타협을 할 수 없었다. 지금 돌아보면 나는 어떤 일에든 ‘내 목숨을 내놓는다’는 각오로 임했다. 그 때문에 과오도 있고, 내 쪽에서 더 큰 피해와 상처를 받기도 했다. 사실 집회에 참석하러 갈 때면 속으로 ‘오늘은 인내심을 갖고 지켜보며 판단하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생각해 보자’ 결심해도 막상 현장에서 그런 상황이 오면 참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늘 경찰들의 표적이 되었다.

구술정리/김중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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