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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인혁당 사형자 주검 탈취 막다 크레인서 떨어져 / 문정현

등록 2010-06-17 18:28

1975년 4월9일 오후 서울 응암동 네거리에서 이날 새벽 확정판결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된 인혁당 사건 송상진씨의 주검을 몰래 빼돌리려는 경찰에 맞서 필자(왼쪽)와 가족들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이 과정에서 다리를 다친 필자는 장애 판정을 받았고 지금도 고통을 겪고 있다.
1975년 4월9일 오후 서울 응암동 네거리에서 이날 새벽 확정판결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된 인혁당 사건 송상진씨의 주검을 몰래 빼돌리려는 경찰에 맞서 필자(왼쪽)와 가족들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이 과정에서 다리를 다친 필자는 장애 판정을 받았고 지금도 고통을 겪고 있다.
문정현-길 위의 신부 14
1975년 2월15일 정부는 ‘긴급조치 1호·4호’ 위반자 가운데 인혁당 관련자와 반공법 위반자를 제외한 149명을 석방했다. 지학순 주교도 풀려났다. 그러나 그해 4월8일 대법원(대법원장 민복기)은 인혁당 관련자 8명에 대한 사형선고를 확정했다. 그리고 18시간 만인 이튿날 새벽 사형을 집행해버리는 사상 초유의 사법살인이 일어났다.

나는 그날 우연히 인혁당 사건의 대법원 상고심 재판에 참석할 수 있었다. 인혁당 가족들의 부탁으로 영국 <비비시>(BBC) 방송 기자와 국제앰네스티에서 파견된 변호사의 통역을 맡았다. 국제앰네스티와 검찰청장의 면담 약속이 잡혀 있어 비비시 방송 피디와 함께 당시 김치열 검찰총장을 만나러 갔다. “재판 과정에 문제가 있지 않은가? 어떻게 할 것인가?” 국제앰네스티 변호사의 물음에 김 청장은 관행적인 대답만 했다. 재판 시간에 맞춰 청장 방을 나와 법정으로 가려고 하는데 경찰이 막았다. 우리는 경찰과 한참 씨름을 한 끝에야 겨우 법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미 복도가 소란했다. 대법원 재판에서는 피고인이 없는 상태에서도 형량을 확정할 수 있다는 것을 이용해 재판부가 인혁당 피고인들에게 사형 등 원심 형량을 확정하는 주문을 읽고는 곧바로 퇴정해버린 것이었다. 가족들은 빈 법정에서 울면서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울분이 터져서 몸을 가눌 수조차 없었다. 가족들은 “인혁당은 조작이다. 사법부는 꼭두각시다”라고 외치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사복경찰들이 가족들을 한명씩 끌어내 트럭에 실었다. 가족들을 따라 나간 나는 급한 마음에 뾰족한 못으로 트럭의 타이어 바람을 빼고 있었다. 그러다 경찰이 손을 내 가랑이 사이에 넣고 국부를 쥐는 바람에 꼼짝할 수가 없어 트럭을 놓치고 말았다.

그날 저녁 명동성당에서는 인혁당 판결을 규탄하는 큰 기도회가 열렸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여러 재야인사들과 많은 사람들이 기도회에 참석했다. 사제들은 비장한 마음으로 십자가를 앞세우고 성당으로 들어갔다. 가족들의 비통한 흐느낌은 모두를 숙연하게 했다. 특히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라며 절규하던 전창일씨 부인 임민영씨의 쉰 목소리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날 밤은 서울 응암동성당 함세웅 신부 사제관에서 잠을 잤는데 이튿날 이른 아침 다급한 전화벨이 울렸다. ‘사형이 집행됐다니….’ 함 신부는 말을 잇지 못했다. 기독교방송국에 전화를 했더니 사실로 확인해주었다. 그길로 서울 서대문구치소로 달려갔더니 이미 경찰들이 배치되어 있고 하재완씨 부인 이영교씨를 비롯한 가족들이 도로에 주저앉아 땅을 치며 울고 있었다. “도대체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나도 죽겠습니다.” 나는 몸부림치며 자꾸만 찻길로 뛰어들려는 부인들을 말리느라 곤욕을 치러야 했다.

메리놀선교회 소속의 제임스 시노트 신부, 윤보선 전 대통령 부인 공덕귀씨를 비롯한 기독교 인사들이 구치소 앞에 모이자 함 신부가 내게 귓속말을 했다. “주검을 명동성당에 안치하자!” 함 신부가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러 자리를 뜨자 경찰이 낌새를 챘는지 주검 인도를 중단했다. 경찰은 교도소에서 나온 주검을 철통처럼 호위해 대구행 고속버스로 끌고 가버렸다.

그러더니 이미 가족들에게 인계해서 출발했던 송상진씨의 장의차마저 응암동 사거리에서 벽제화장터로 빼돌리려고 했다. 나는 경찰들에게 장의차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자동차 키 박스에 껌을 집어넣고, 신문을 뭉쳐 자동차 배기통에 집어넣었다. 또 차 밑으로 들어가 우리를 깔고 가라고 누워버렸다. 그렇게 오후 늦게까지 대치가 계속되자 사람들이 몰려오고 경찰만 해도 400명이 넘게 에워쌌다. 그런데 갑자기 크레인이 나타나더니 차를 묶었다. 나는 크레인 위로 올라가 “인혁당 사건은 조작이다. 재판을 하자마자 다음날 사형을 집행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외쳤다.
문정현 신부
문정현 신부
억지로 끌어내리려는 경찰들과 실랑이를 하다 밀려 크레인 위에서 떨어진 나는 다리를 다쳤다. 얼마 뒤, 전주에서 다친 다리를 수술하는데 마취에서 깨어날 무렵 내가 “박정희 유신정권 타도하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수술진과 동생 문규현 신부가 진땀을 뺐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때 다쳐 장애 5급 판정을 받은 다리는 지금껏 불편하다. 그날 송상진씨의 주검은 결국 벽제화장터로 끌려가 화장을 당했다. 그 장의차를 운전했던 기사는 평소에는 몇 시간을 기다려야 했는데 송씨의 주검은 도착 즉시 화장을 할 수 있었다고 훗날 전했다. 유족들과 우리는 경찰들이 그처럼 인혁당 사형수들의 주검을 빼돌려 급하게 화장시킨 까닭이 고문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훗날 사실로 밝혀졌다.

구술정리/김중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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