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3·1 민주구국선언으로 필자를 비롯한 성직자와 민주인사들이 무더기로 구속되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신부들과 신자들이 3월 중순 서울 명동 성모병원 마당에서 ‘3·1 명동사건’ 구속자 석방과 헌정질서 회복을 촉구하는 시국기도회를 열고 있다.
문정현-길 위의 신부 15
1974~75년 인혁당 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장기집권을 노리고 유명인사들을 반공법으로 몰아붙이면 반발이 심할 것을 우려해 일부러 평범한 사람들을 얽어매 공안정국을 조성하려고 조작한 사건이었다. 독재정권에 대한 항거가 거세질수록 유신정권의 공포정치는 날로 심해져갔다. 박 정권에 반대하고 인권운동을 했던 미국 감리교 선교사 조지 오글 목사와 메리놀선교회의 제임스 시노트 신부에 대한 추방명령도 그 하나였다. 인혁당 조작 사실을 미국 언론에 알렸다는 이유로 오글 목사가 74년 10월 추방된 데 이어 시노트 신부도 75년 4월30일 끝내 한국을 떠나야 했다. 정부는 다른 선교사들에게도 비자를 내주지 않으려고 했고, 천주교와 시민세력은 거기에 맞서 싸웠다.
76년은 겉으로는 민주화운동의 침체기였다. 대학교수 500여명이 재임명 탈락의 방식으로 무더기 해고돼 대학까지 권력의 통제 아래 장악됐다. 그럴수록 민주화에 대한 염원도 더 커졌다. 김지하 시인 구명을 위해 연대했던 가톨릭과 개신교는 각자 3·1절을 준비하고 있었다. 개신교에서는 문익환 목사의 주도로 윤보선·함석헌·정일형·문동환·이문영·서남동·안병무·이해동·김대중·이우정이 3·1 구국선언문을 준비하고, 가톨릭에서는 함세웅 신부를 비롯한 사제들이 김 시인과 인혁당 인사들의 석방을 위한 명동성당 기도회를 조직하고 있었다. 서로 계획을 알게 된 가톨릭과 개신교는 함께 뜻을 모아 그해 3월1일 저녁 6시 명동성당에서 3·1절 기념미사를 거행했다. 미사의 강론은 김승훈 신부가 했고, 2부 구국기도회에서는 내가 김 시인의 어머니가 쓴 호소문을 대신 읽은 뒤 문동환 목사가 설교를 했다. 마지막으로 이우정 교수가 ‘3·1 민주구국선언문’을 낭독했다.
그러자 유신정권은 이 3·1절 미사를 ‘3·1 명동사건’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국가전복 내란을 기도했다며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관련자들을 구속했다. 나와 신현봉 신부는 그때 선언서 작성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는데도 잡아들였다. 나중에 재판 과정에서 중앙정보부가 사전에 모든 과정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중정은 3·1절의 종교행사를 개신교와 가톨릭의 성직자들을 한꺼번에 탄압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나는 3·1 미사를 마치고 그날로 전주로 내려와 해성학교 기숙사에 있던 숙소에서 이튿날 새벽 연행되었다. 평소 이미 구속을 각오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위축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끌려가 도착한 곳은 서울시경의 남산안가였다. 2층짜리 단독주택이었는데 입구엔 ‘한성무역’이란 간판이 달려 있었다. 사복경찰들은 도착하자마자 나를 몹시 험하게 다루며, 자기들끼리 “에이(A)급이 잡혀왔다”고 숙덕거렸다. 이후 닷새 동안 그들은 나를 윽박지르거나 회유하며 잠을 재우지 않았다. 내가 조사를 받는 도중 안충석 신부와 전주 남문교회 은명기 목사도 잡혀왔다. 주로 인혁당 사건과 김지하 석방운동에 대해 조사를 받았다.
경찰 조사가 끝나자 남산의 중정6국으로 끌고 갔다. 거기 서는 안기부 요원 3명이 붙어서 계속 잠을 안 재웠다. 옆방에서도 누군가 조사를 받는지 비명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소리에 겁이 나기보다는 더 이가 갈리고 용기가 났다. 그러다 군복 차림의 ‘덩치’ 10여명이 들어와 나를 둘러싸더니 “네가 문정현 신부야”라고 했다. 모멸감이 들어 이를 악물고 그중 한명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그는 내 턱을 탁 치면서 엄포를 놓았다. “개 패듯이 패버려? 그러면 시끄럽겠지?” 한참 자기들끼리 욕지거리를 하면서 모욕을 주더니 다 나가버리고 한 명만 남았다. 그는 회유를 시도했다. “저 새끼들 막돼먹은 놈들이에요. 저러면 안 되는 건데, 사실은 내 장인어른이 성당 사목회장이에요. 신부님 보니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서 나는 호통을 쳐줬다. “뭐요? 여기서 사목회장 소리가 왜 나와? 너 장인 팔아서 뭐 할 거야.” 그러자 그는 머쓱해져서 나가고 다른 요원들은 히죽히죽 웃었다.
정작 조사받는 내내 나를 불안하게 했던 것은 허리춤에 숨겨 두었던 성명서였다. 느닷없이 연행되는 바람에 미처 버리지 못했는데 성명서에 여러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어 신경이 쓰였다. 계속 눈치를 보다 화장실에 가겠다고 하자 조사관 2명이 옆에 붙었다. 화장실에 들어가 성명서를 조각조각 찢어 변기에 넣은 뒤 물을 내렸다. 그런데 종잇조각이 가벼워 다 내려가지 않고 물 위에 떴다. 나는 그 종잇조각을 주워 입에 넣고 삼켰다. 구역질이 나오려고 했지만 마음은 편안해졌다. 화장실에서 나오다가 지팡이에 의지해 복도를 지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났다. 몹시 초췌해 보였다. 말을 걸 수는 없었다. 사흘 뒤 조서를 꾸민 뒤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됐다. 난생 첫 경험이었다.
구술정리/김중미 작가
문정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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