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를 비롯해 이른바 ‘3·1 명동성당’ 사건 관련자에 대한 1심 첫 공판이 열린 1976년 5월4일 구속자 가족들이 대법원 후문 앞에서 가슴에 수인 번호를 달고 하얀 우산을 나란히 든 채 ‘공개재판·민주인사 석방’ 요구 시위를 벌이고 있다. 왼쪽 셋째부터 문익환 목사 부인 박용길 장로, 안병무 교수 부인 박영숙씨, 맨 오른쪽이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씨이다.
문정현-길 위의 신부 17
1976년 5월4일 나를 비롯한 ‘3·1 민주구국선언’ 관련자 1심 1차 공판이 열렸다. 재판은 감옥에서 같이 구속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저마다 따로 갇혀 있다가 법정에서나마 얼굴을 보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교도소에서 법원까지 가는 동안에는 한 사람에 교도관 2명씩이 배치되어 서로 인사말도 하지 못하게 했다. 호송차가 법원으로 들어가면 가족이나 방청하러 온 사람들이 부르는 ‘우리 승리하리라’라는 노랫소리가 들렸고 우리는 차 안에서나마 서로의 존재를 알리려고 애썼다. 공판은 8월28일까지 15회에 걸쳐 진행되었다. 공판 때마다 변호인단과 재판부 사이에서는 치열한 설전이 이어졌다. 우리 재판에는 이돈명 유현석 하경철 황인철 변호사 등 27명이나 참여했다. 재판부는 공개재판의 원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검찰 쪽 증인은 모두 채택하면서 변호인들이 신청한 김지하, 김지하의 어머니 정금성 여사, 지학순 주교 등은 한번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뒤 항소심은 11월13일부터 12월29일에 걸쳐 열렸다.
재판을 받을 때마다 느낀 것은 나나 함세웅·신현봉 신부 같은 사제들에 비해 목사·교수·정치인 등 다른 피고들은 박학다식하고 논리정연하게 말을 잘한다는 것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워낙 달변에다가 경험이 많아서 진술을 능숙하게 했고, 문익환·문동환·서남동 목사와 안병무·이문영 교수는 신학적 지식의 바탕 위에 적절한 비유를 들어 정권을 호통치는데 내가 듣기에도 기가 막힐 정도였다. 또 가장 고령이었던 윤반웅 목사는 신념이 대단했다. 한번은 윤 목사가 “유신정권은 미친개다. 때려잡아야 한다”고 하자 검사가 화가 나서 난리를 쳤지만 끝까지 꼿꼿했다. 나도 재판장에 나가기 전 공소장을 보고 준비를 했지만 그분들의 진술을 듣고 나면 부끄러웠다. 오죽했으면 김수환 추기경이 어느날 재판을 방청하고 난 뒤 “다른 사람들은 똑똑한데 우리 신부들만 그렇지 못하다”고 말할 정도였을까? 다른 분들은 오랫동안 민주화운동을 끌어온 투사들이었지만 우리는 그저 지학순 주교님이 구속됐다는 사실에 분노해 갑자기 운동에 나섰으니 미숙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겁은 없었다. 한번은 검사가 내 진술 태도가 불손하다고 뭐라 하기에 대뜸 강짜를 부렸다. “그럼 검사를 주교로 모실까?” 2심 때 또 한번은 김지하 시인 어머니를 증인으로 받아주지 않는 재판부를 향해 법대를 뛰어넘어가서 항의를 했다. 함세웅 신부가 얼른 내 허리춤을 꽉 잡고 말렸지만 재판정에서 “유신정권 물러나라”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신현봉 신부는 최후진술 때 대뜸 곡을 했다. 재판장이 뭐하는 짓이냐고 꾸짖자 신 신부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민주주의가 죽었습니다. 아이고, 아이고!”
77년 3월22일 대법원 판결에서 김대중·문익환·윤보선·함석헌은 징역 5년에 자격정지 5년을 받고 나를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은 징역 3년에 자격정지 3년을 선고받았다. 그동안의 변론이나 진술은 다 무시됐고 그들이 짜놓은 각본대로 된 것이다. 훗날 어쩌다 만날 때면 김대중 전 대통령은 ‘문정현 신부가 법정에서 난리를 피운 바람에 5년 선고받을 걸 곱빼기로 10년 받은 거’라고 농담을 하곤 했다.
재판을 받는 동안 내내, 끝나고 감방에 돌아오면 내가 할 말을 제대로 다 못한 것 같아 아쉽고 더욱 안타까웠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나머지 큰 자극이 되어 감옥에 있는 동안 독서에 집중하여 실력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마침 문익환 목사 등이 작업한 신구약성서 공동번역본이 출판돼 성경을 깊이 읽을 수 있었다. 성서는 영어로도 여러 번 읽었다. 참 재미있게 읽은 것은 판소리에 관한 고전소설이었다. 수필집 중에서는 이희승의 <딸깍발이>란 책이 거의 주어·동사로만 이루어졌는데도 재미있었다. ‘글을 이렇게도 쓰는구나’ 느끼고 나도 그렇게 쓰려 애썼다. 나는 책을 한 권 다 읽을 때마다 파리를 한 마리씩 잡아서 봉투에 넣었다. 그러면 바싹 말라서 파리의 머리와 몸이 떨어진다. 감옥에서는 그걸 세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정작 천주교 순교사화에 관한 책은 반입이 허락되지 않았다. ‘천주교 역사인데 왜 주지 않느냐’고 싸워도 봤지만 끝까지 안 줬다. 오히려 그 무렵 번역 출판되어 많은 사람들이 읽던 <해방신학>은 반입을 허락해 10번도 더 읽었다. 그 당시라면 금서가 되었어야 마땅할 내용인데 신학책이라는 이유로 허가된 것이었다. 참 바보들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책도 많이 읽었다. 읽을수록 ‘교회는 이 세상 속에 있으며 세상의 등불 구실을 해야 한다’는 깨달음이 강해졌다.
구술정리/김중미 작가
문정현 신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