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마지막날 김해교도소에서 풀려난 필자(오른쪽)가 이듬해 1월 서울 중구 명동에 있는 전진상교육관에서 함세웅(왼쪽 둘째)·신현봉(필자 왼쪽) 신부와 만나 서로의 옥살이 노고를 위로하고 있다. 이들은 당시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천주교 구속동지 3인방’으로 불렸다.
문정현-길 위의 신부 20
1977년 12월31일 형집행정지로 김해교도소에서 출옥한 나는 곧장 전주 파티마성당으로 부임을 받았다. 파티마성당은 전동성당에서 분가한 본당으로 나중에 효자동성당이 되었다. 효자동은 지금은 아파트와 다세대주택들이 들어선 신도시지만 그때는 주변이 모두 복숭아 과수원이었다. 나는 효자동성당의 첫 주임신부였다.
그때는 유신 말기라 날마다 굉장한 감시 속에 살았다. 정보 경찰이 성당 건너 민가의 담 밑이나 성당 오른쪽에 있던 소금가게를 아지트로 삼아 24시간 감시를 했다. 심지어는 내 침실 창문 밑에서 밤새 지켰다. 특히 3월1일만 되면 경찰들이 며칠 동안 죽치고 있었다. 하루는 성당 사무장이 기가 질려서 들어왔다. 사무장이 가는 곳까지 일일이 따라다니며 거기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샀는지 전부 조사했다는 것이었다. 성당과 사제관 전화는 물론 도청이 되었다. 하루는 통화를 하고 있는데 전화기 너머로 엉뚱하게 동장님 찾는 소리가 들렸다. 전화를 끊고 동사무소로 달려가니 거기에 경찰이 있었다. 내가 뭐하는 짓이냐고 호통을 치자 그는 아무 말을 못했다. 그때는 경찰도 자신들이 정도 이상의 불법적 행동을 하고 있다는 걸 인정한 셈이었다. 지금 같으면 안 했다며 시치미를 딱 잡아뗄 텐데 말이다. 한번은 나를 6년 동안이나 따라다니던 정보과 형사를 붙잡고 다그쳤더니 이렇게 고백했다. “신부님 저희도 어쩔 수 없습니다. 하라는 대로 안 하고 신부님 놓치면 ‘모가지’ 당합니다. 신부님을 한 발자국도 못 나오게 해야 합니다. 신부님이 말을 안 들으시면 연행을 해야 합니다.”
그들은 감시만 한 게 아니라 끊임없이 회유도 했다. 그무렵 정부는 ‘종교 새마을운동’이라는 명목으로 사찰이나 교회의 길과 집을 고쳐주고 있었다. 효자동성당은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본당이라 성당 마당과 진입로가 흙길이었다. 그래서 비가 오면 성당 안까지 온통 흙바닥이 되곤 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한번은 당시 전북 부지사로부터 도에서 포장을 해주겠다는 제안이 왔다. 나는 관하고 내통하지 않는다며 단호하게 거절을 했다. 그런데 어느날 시멘트가 성당 마당에 엄청 쌓여 있었다. 나는 곧장 전화를 해서 “나는 부도덕한 정권의 도움을 받기 싫으니 당장 가져가”라고 호통을 쳤다. 시멘트는 다음날 치워졌다. 교우들은 그런 나를 원망하기도 했다.
또 하루는 정보부 사람이 찾아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우물쭈물하더니 “신부님 명목으로 나오는 돈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 돈으로 적금을 들었으니 신부님께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라며 불쑥 봉투를 내밀었다. 100만원이 들어 있었다. 당시로는 무척 큰돈이었다. 나는 “너, 사람을 어떻게 보고 이걸 가지고 와!” 하며 그 돈을 빼앗아 바닥에 내던졌다. 빳빳한 만원짜리 새 지폐가 사무실 바닥에 쫙 깔렸다. 그때 마침 어머니가 들어오시다가 바닥에 깔린 돈을 보고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이게 무슨 일이여? 참말로 나쁜 사람들이네, 우리 신부를 돈으로 매수하려고 하다니.” 어머니와 나는 바닥에 깔린 돈을 주워 밖에 있던 정보부 요원에게 돌려보냈다. 나는 물질적인 유혹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2004년 <문화방송>에서 ‘길 위의 신부’ 다큐멘터리를 촬영할 때 인터뷰했던 내 담당 경찰이 말했다. “문정현 신부에게는 유화책이 통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의 처지를 이해하고 배려해줘 목이 달아나게는 하지 않았다. 신부님의 흠을 잡으려고 수없이 문을 따고 들어가 방을 수색하고 서랍을 뒤졌지만 통장이 나오질 않았다.” 1990년 윤석양 이병의 양심선언으로 드러난 국군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내용 가운데 나에 대한 부분은 이렇게 쓰여 있었다. “외고집으로 타협할 줄 모르며 매사에 도전적 반항적이나 신도로부터 존경받고 있으며 금전에 관심이 없고 저돌적 성격으로 깡패신부라 부른다.” 싫은 말은 아니었지만 황당했다.
어쨌거나 그 시절 나는 효자동성당 주임신부로서 본당 사목에 최선을 다하면서 정의구현사제단 활동을 계속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유신정권과 맞서 ‘인권회복을 위한 특별미사’, ‘농촌 및 노동사회의 의식계발을 위한 세미나’를 열고, 해고노동자들이나 가톨릭농민회와 연대활동을 계속해나갔다. 그때 고산성당 본당신부로 있던 문규현 신부가 가톨릭농민회 활동을 활발하게 지원한 덕분에 나 역시 농민회 활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구술정리/김중미 작가
문정현 신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