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들어 유신정권의 탄압이 거세지자 천주교계는 전국적인 시국기도회로 저항했다. 이른바 ‘전주 7·6사태’로 불리는 전주 파티마성당 침입과 문정현·박종상·문규현 구타 사건은 김수환 추기경이 내려온 가운데 당시 경찰국장이 무릎 꿇고 사과하면서 가까스로 수습됐다.
문정현-길 위의 신부 21
1978년 6월29일 카터 대통령의 방한을 앞두고 종교인, 민주인사들에 대한 연금·미행·도청이 한층 심해졌다. 그러더니 7월5일 전주교구의 새 사제 서품이 있던 날까지 신부들을 일일이 감시하고 서울행을 저지했다. 우리는 전주 가톨릭센터에 모여 ‘천주교 신부가 공산당이냐? 미행 감시를 즉각 중단하라’는 현수막을 걸고 구호를 외치며 기도를 했다.
7월6일 경찰은 전날의 시위에 대해서 조사할 게 있다며 출두명령을 내리고 효자동성당으로 들이닥쳤다. 나는 문을 열지 않은 채 나를 알만한 신부들한테 도움을 청했다. 그때 가장 먼저 달려온 이가 박종상 신부였고 문규현·이수현 신부도 잇따라 도착했다. 박 신부는 내 방으로 들어와 방 창문을 뜯어내려는 경찰들을 막다가 사복경찰 손에 잡혀 창틀 너머로 끌려 나갔다. 나도 결국 연행되어 나왔다. 경찰들 손에 잡혀있던 박 신부가 나를 보고는 경찰들 손을 뿌리치고 달려왔다. 그러다 다시 경찰에 잡힌 박 신부는 엄청 두들겨 맞았다. 결국 나와 박 신부는 규현 신부가 이미 타고 있던 호송차에 억지로 태워졌다. 이 신부는 다른 차에 실려 있었다.
우리를 태운 호송차가 성당을 떠나는가 싶더니 갑자기 용머리고개 전 효자동 삼거리에서 멈췄다. 그러더니 박 신부를 길가에 내버리고 차를 출발시켰다. 경찰은 얼마 가지 않아 다시 차를 세우고 규현 신부를 억지로 떠밀어 내리게 했다. 규현 신부는 지나가던 대학생의 도움으로 차를 잡아 박 신부에게로 가서 그를 성모병원에 입원을 시켰다.
나는 그대로 안가로 잡혀 들어갔다. 금암동 철길 너머에 있던 안가였다. 이 신부도 잡혀 와 있었는데 별도로 조사를 받았다. 그런데 정보부원과 경찰들의 태도가 무척 긴장돼 보였다. 밤새 조사를 하고 조서를 받아놓고도 더는 수사를 진척을 시키지 않았다. 나는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아침 화장실에 가면서 밤새 쓴 조서를 슬그머니 들고 가 갈가리 찢어버렸다. 눈치를 챈 경찰들이 화장실 밖에서 “신부님 뭐 하는 짓입니까?” 하면서도 더는 채근을 하지 않았다. 박 신부의 부상이 심각해지자 경찰은 나를 사흘 만에 풀어줬다. 석방되자마자 곧장 병원에 있는 박 신부한테 갔더니, 그는 입원한 당일에는 타박상이 어찌나 심했는지 강한 진통제를 맞고도 잠을 못 이뤘다고 했다.
‘박 신부 구타 유기 사건’이 알려지면서 전주교구 사제들과 수도자들, 전 신자들이 일어나 진상조사와 경찰서장 파면, 정보부 사과를 요구했다. 내가 잡혀가 있던 7월10일, 중앙성당에서는 정의와 평화를 위한 미사를 봉헌하고 거리시위를 했다. 그런데 기동타격대는 특수장비까지 동원해 시위대를 막고는 다시 강덕행 신부를 폭행하고 수녀들의 두건을 벗겼다. 전주교구 사제단은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결국 7월18일 정부의 치안책임자가 신부 구타와 유기 사건에 대한 공개사과를 하고, 사제들에 대한 감시와 미행을 중지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또 폭행사건 관련자들을 조사해 처벌하기로 했다.
그런데 얼마 뒤 8월23일, 아버지(문법문)가 돌아가셨다. 규현 신부가 있던 고산성당에는 딸린 텃밭이 꽤 넓었는데 아버지는 그 텃밭 농사를 해주고 있었다. 돌아가시던 날도 아버지는 하루 종일 텃밭에서 김장채소 심을 준비를 했다. 그날 저녁 중앙성당에서 열릴 시국미사에 참여하시려고 아버지는 평소보다 더 부지런히 일을 끝내고 서둘러 성당을 나섰다가 버스정류장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마침 옆에 있던 한 신자의 도움으로 고산성당으로 연락을 했지만 하필 규현 신부는 동기 동창 모임에 가고 성당에 없었다. 다행히 규현 신부를 도와주고 있던 막내 이모가 아버지를 전주성모병원으로 옮겼지만 운명하시고 말았다. 본당 일과 사회운동으로 바쁜 날을 보내던 나와 규현 신부는 아버지가 협심증을 앓고 있었다는 것조차 미처 모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두 아들의 사회운동을 순교자 정신으로 이해하고 지지한 분이었다. 또 아들들이 감옥에 가는 것조차 당당하게 받아들이시고 자부심으로 여겼다. 내가 그해 7월 경찰에 연행되었을 때는 연령회(애령회) 회장님과 함께 모래를 주머니에 넣고서 안가로 가 경찰들에게 모래를 뿌리고 나를 구출하려는 계획까지 세우셨다고 했다. 물론 계획으로 그치고 말았지만 아버지의 그 마음이 지금까지 깊이 남아 있다. 나와 규현 신부는 그런 아버지를 허망하게 잃고 말았다.
구술정리/김중미 작가
문정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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