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84년 정부가 ‘전두환식 생활운동’으로 장려한 축산산업은 소값과 쇠고기값 폭락을 가져와 전국적인 농민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85년 9월23일 전주 중앙성당에서 ‘외국 축산물 수입반대 가톨릭 농민대회’를 마친 농민회원들이 거리로 진출을 하려고 성당을 나서고 있다. <천주교 전주교구사1>에서
문정현-길 위의 신부 30
전북 장수군의 장계성당은 내가 맡았던 본당 중에 가장 특별했다. 가톨릭 신자가 아닌 농민들에게도 문을 열고 농민회를 통해 함께했다. 그 특별함은 나 혼자서가 아니라 본당 신자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것이었다.
장계성당에서 가장 기억이 나는 분은 송남수 농민회장이다. 송 회장은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마친 분이지만 논리적이고 문제의식이 뚜렷했다. 또 지도력이 있고 부지런했다. 나나 다른 회원들이 옆에서 조금만 도와주면 농민회를 잘 이끌어 갈 수 있는 그런 분이었다. 성명서나 대자보 쓰는 일도 곧잘 했다. 직접 농사를 짓는 분이라 농촌문제의 원인을 꿰뚫고 있어서 흠잡을 데 없는 글을 써냈다.
그러나 대자보는 장계고등학교 국어교사였던 김인봉 선생이 주로 썼다. 지금은 장수중학교 공모제 교장으로 있는 김 선생은 내가 농민회를 조직하기 위해 공소를 갈 때마다 동행했다. 우리는 농민회 활동을 알리기 위해 어느 집에서 상량식을 한다고 하면 막걸리를 받아가서 같이 어울리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농민회 일을 열심히 돕던 김 선생의 형은 면서기였다. 김 선생이 농민회 이름으로 대자보를 붙이면 그의 형은 밤에 몰래 대자보를 뗐다. 그렇게 다음날 낮이 되면 동생은 대자보를 또 갖다 붙이고 밤이 되면 또 형이 떼는 일을 한참 동안 되풀이했다. 김 선생은 장계성당에서 3년 동안 농민회 일을 돕다가 와이엠시에이(YMCA) 교사회를 만나면서 89년부터 전교조 일을 시작했다.
전두환 정권은 농어촌 소득증대를 위한 ‘전두환식 생활운동’이라며 축산산업을 장려했다. 81년부터 84년에 걸쳐서 캐나다와 뉴질랜드에서 값싼 소를 수입해 전국 농가에 팔았다. 농민들은 너도나도 농협 빚을 내서 소를 샀다. 그런데 그중에 병든 소, 늙은 소들이 섞여 있어서 더러 죽는 일이 있었다. 게다가 소가 갑자기 크게 늘어나는 바람에 소값이 떨어져서 ‘개값’이 되었다. 그뿐 아니라 당국은 82년부터 약 90만마리 분의 외국산 쇠고기를 수입해 축산농가의 생존권을 위협했다. 85년이 되자 농민들은 ‘외국 농축산물 수입반대 및 소값 피해 보상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해 7월1일 경남 고성 두호분회의 첫 소몰이 시위를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소몰이 싸움이 일어났다. 전북 농민회에서도 소몰이 싸움에 적극 동참해 진안과 임실, 부안 일대로 번져 나갔다. 당시 전주교구 교육국장으로 있던 문규현 신부와 교구 농민회 지도신부이면서 고산 본당 주임신부였던 박병준 신부는 고산과 완주의 소몰이 싸움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7월19일 고산에서 벌어진 소싸움은 일단 농민들의 승리였다. 경찰은 경운기와 소를 앞세워 밀고 나오는 농민 시위대를 효과적으로 진압하지 못했다. 그러나 7월26일의 진안 소싸움 때는 경찰의 대응도 달랐다. 무주, 장계에서 진안으로 가는 길목과 골짜기마다 덤프트럭을 세워두거나, 경운기 이동을 막기 위해 타이어 공기를 빼놓거나 체인을 훼손하는 등 강경하게 대처했다. 그러자 농민들도 시위 사흘 전부터 소와 경운기를 집회장소 인근 산으로 옮기며 치밀하게 준비를 했다. 우리 장계성당도 진안 소싸움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밤에 몰래, 진안 어은동·동구점·소토실 마을에다 소를 숨겨 놓고 잤는데 군청에서는 덤프차를 길목마다 세워서 막았다. 우리는 소를 끌고 산을 넘어서 군청으로 갔다. 소를 끄는 시위대를 할머니, 아주머니들이 앞장서니 경찰도 함부로 못했다. 우리는 진곡리 정자나무에 이르러 경찰과 대치했다. 지친 소들은 아스팔트 위에 똥을 쌌고, 농민들은 그 똥을 전경들한테 던졌다. 그러나 경찰은 소가 흥분할까 봐 최루탄을 쏘지 못했다. 지루한 대치 끝에 경찰을 뚫고 진안군청 앞까지 진출했다. 농민들의 대승리였다. 창피해진 관계기관에서는 농민들의 기를 꺾으려고 연행작전을 폈다. 가톨릭농민회는 곧장 가톨릭센터로 가서 농성을 시작했고 결국 모두 훈방되었다.
그렇게 농민과 경찰의 대치 속에 소몰이 투쟁은 점차 확산되어 갔다. 결국 경찰의 강경진압은 부안군 하서면 집회에서 최고조에 이르게 되고, 수많은 농민들이 부상을 입었다. 경찰의 가혹행위가 알려지면서 전북 농민들의 소값 투쟁은 전국 집회로 번졌다. 초기 투쟁은 가톨릭농민회 중심으로 시작되었지만 곧바로 기독교농민회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군 단위 투쟁에 참여한 인원만 1000여명에 이르렀다. 구술정리/김중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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