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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통일논의 물꼬 튼 ‘방북’ 이해시키려 동분서주 / 문정현

등록 2010-07-25 18:47

1992년 성탄전야에 가석방된 문규현(왼쪽) 신부와 임수경(오른쪽) 학생이 이듬해 1월 초 필자가 운영하고 있던 전북 익산 ‘작은 자매의 집’에서 만나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있다. 문익환 목사에 이은 두 사람의 방북은 통일운동의 물꼬를 튼 역사적 사건이었다.
1992년 성탄전야에 가석방된 문규현(왼쪽) 신부와 임수경(오른쪽) 학생이 이듬해 1월 초 필자가 운영하고 있던 전북 익산 ‘작은 자매의 집’에서 만나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있다. 문익환 목사에 이은 두 사람의 방북은 통일운동의 물꼬를 튼 역사적 사건이었다.
문정현-길 위의 신부 40
1989년 문규현 신부와 임수경의 방북은 예상대로 통일 논쟁의 불씨가 되었다. <한겨레>와 조·중·동 보수 신문의 대결 구도가 벌어졌다. 작가 이문열은 “사제복을 벗어라. 빨갱이다”라고 비난했다. 그때 ‘한겨레’가 없었다면 통일에 대한 논의가 그렇게 활발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한겨레’는 다른 언론과 달리 문규현 신부의 파북 사건을 객관적으로 보도했고, 이는 정의구현사제단과 문 신부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해주었다. 두 사람 덕분에 서로 막혀 있던 남북이 만나 토론을 하고 “우리는 형제요 자매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바람직한 일이었다. 또 통일에 대한 논의가 표면화된 것도 성과였다. 그러나 두 사람을 향한 사회의 시선은 차가웠다.

보수 진영에서는 금단·금기의 선을 넘은 두 사람을 비난하고 증오했다. 그런 갈등과 비난을 견디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본당에서 주일미사를 할 때도 신자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읽을 수 있었다. 나는 본당에서나 어디 가서나 두 사람의 방북사건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했다.

신자들의 부정적인 시선을 바꾸는 데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미국에서 제작된 다큐멘터리 <하나되게 하소서>였다. 이 다큐는 임수경 학생과 문규현 신부가 분단의 선을 넘는 과정을 담고 있었다. 임수경의 ‘성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와 교황님께 보내는 편지, 문규현 신부의 기도, 남쪽으로 넘어온 뒤 두 사람의 강연회 등등 그 자체가 천주교의 전례로 느껴질 만큼 엄숙해서 보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전주교구 신부 피정 때 그 다큐를 본 안동교구의 두봉 주교(본명 르네 뒤퐁)도 “신부님 영상을 보고 나니, 듣는 거랑 다릅니다. 이것은 엄숙하고 감동적인 종교예식입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 다큐를 700여개 복사해 전국으로 배포했다. 영상을 본 사람들은 왜 임수경이 북한을 방문했으며, 문규현 신부는 왜 임수경의 동행자가 되어주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고, 분단의 벽을 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도 이해했다. 그러나 공안당국에서는 이 비디오를 뺏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고, 심지어는 비디오 플레이어까지 빼앗았다. 다만 부산과 전주에서만은 경찰도 적극적으로 달려들지 못했다.

문규현 신부가 공주교도소에 수감돼 있는 동안 일본에서 하마오 주교가 한국으로 성지순례를 와서 전주에 들렀다. 나와 따로 만났을 때 하마오 주교는 김남수 주교한테 호되게 욕을 먹었다고 말하면서도 대담하게 우리 사제단을 이해해주었다. 하마오 주교가 규현 신부의 방북을 인성회 사무총장의 일로 승인해준 덕분에 1차, 2차 방북은 모두 종교적인 활동이었고 합법적이 되었다. 특히 2차 방북은 임수경이란 어린 여성과 함께 십자가를 진다는 면에서 인도주의와 종교적인 측면이 강한 것이었다. 국내외에서도 한국 천주교회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고, 두 사람의 방북을 진정한 목자와 양의 관계로 이해했다. 훗날 두봉 주교가 평양을 방문했을 때 북쪽 사람들도 남쪽의 천주교 사제로 문규현 신부를 맨 먼저 떠올린다고 했다.

나는 규현 신부가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그를 대신해 사제단 신부들과 기도회를 열고 통일에 대한 강론이나 강의를 하러 다녔다. 그는 감옥에서 <천주교회사>, <분단의 장벽을 넘어>라는 두 권의 책을 냈다. 나는 그 책을 소개하는 강연을 하러 다니면서 그의 옥바라지를 했다.


문정현 신부
문정현 신부
91년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결성준비위원회가 꾸려졌을 때 내가 천주교 쪽 대표를 맡게 되었다. 하지만 실무적인 문제를 비롯한 운영에 대해서는 거의 몰랐다. 연락이 오면 가서 참석하는 상징적인 노릇에 불과했다. 아마 그쪽에서는 통일운동에 대한 탄압 국면에서 천주교 사제를 대표로 내세우는 것이 더 안전하다 싶었던 것 같다. 우여곡절 끝에 그해 결성준비위원회는 무산됐으나 4년 뒤 95년 범민련 남측본부가 공식 출범했다. 89년 3월 문익환 목사의 방북에 이은 임수경, 문규현 신부의 방북 사건은 그렇게 우리 사회에 통일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되었다.

구술정리/김중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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