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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나를 깨고 ‘섬김’을 일러준 익산 ‘노동자의 집’ / 문정현

등록 2010-07-26 21:39

1987년 4월 군산 오룡동성당(주임 박창신 신부)의 ‘노동자의 집’(근로자의 집) 현판식에서 사목회장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필자가 축사를 하고 있다. 장수의 장계성당에 있던 그 시절부터 필자는 노동사목 활동을 지원하며 노동자들 속으로 다가가고자 애썼다.  <천주교 전주교구사>에서
1987년 4월 군산 오룡동성당(주임 박창신 신부)의 ‘노동자의 집’(근로자의 집) 현판식에서 사목회장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필자가 축사를 하고 있다. 장수의 장계성당에 있던 그 시절부터 필자는 노동사목 활동을 지원하며 노동자들 속으로 다가가고자 애썼다. <천주교 전주교구사>에서
문정현-길 위의 신부 41
1976년 지학순 주교의 구속 사건을 계기로 민주화 투쟁을 시작한 내 의식의 밑바닥에는 권력과 힘없는 이들 사이에서 희생자인 약자의 편에 서는 것이 예수의 길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었다. 그래서 교구의 사제로 본당에 부임할 때마다 그곳에서 가장 낮은 이들 편에 서고자 했다. 농촌지역에 가서 사목활동을 할 때는 농민의 편에 서는 것이고, 또 노동자들이 많은 성당에서는 노동자의 편에 서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전북 장수 장계성당에서는 농민들과 함께할 수 있었고, 또 그곳에서 장애아들을 위한 작은 자매의 집을 하게 되었다. 익산 창인동성당에서는 비로소 노동자들의 삶에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익산(당시 이리)에는 79년부터 가톨릭노동청년회 조직 활동가인 이철순이 내려와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태창메리야쓰 민주노조의 싹이 튼 것이다. 이철순은 전북지역에도 노동자의 집(당시 근로자의 집)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네덜란드의 ‘세베모’라는 교회 지원단체에 프로젝트를 제안하고자 당시 교구장인 박정일 주교의 승인을 받았다. ‘세베모’에서는 노동자의 집에 대한 재정지원을 승낙하면서 점차적으로 교구 자체의 재정지원을 늘려 자립해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이를 계기로 83년 천주교 전주교구 ‘노동자의 집’이 개설되었고, 이듬해 12월에는 창인동성당, 85년에는 전주 중앙성당, 86년에는 군산 오룡동성당에서 노동자의 집이 문을 열었다.

나는 창인동 본당 신부로 부임하기 전부터 노동자의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이미 리수현, 문규현 신부가 노동자의 편에 서서 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투쟁을 지원하거나 결합하면서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특히 내가 장계성당에 있을 때 일어났던 익산의 후레아패션 노조 투쟁에 리 신부가 관여하면서 가까이 지켜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익산은 70년 1월 마산과 더불어 수출자유지역으로 지정되었고, 74년 말 29만평 규모의 공단 조성이 완료돼 외국 기업들의 입주가 시작되었다. 수출자유지역에는 외국 기업에 대한 관세 혜택이 주어지고, 노동조합의 설립은 법적으로 금지돼 있었다. 이리 수출자유지역에 독일 기업인 후레아패션이 들어선 것은 78년 무렵이었다. 후레아패션은 전북 내에서 꽤 규모가 큰 의류공장이었지만 노동 조건은 형편없었다. 초임 일당이 2700원으로 최저였고, 주야 2교대로 혹사를 당하고 있었다.

86년 4월 후레아패션 노동자들은 회사 쪽에 16.5%의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용노조의 위원장이 독단으로 회사와 12.5%의 인상안에 타협하고 잠적해버렸다. 후레아패션의 노동자들은 이 타결이 무효임을 선언하고 파업에 돌입했고 회사 쪽은 기습적으로 휴업공고를 낸 뒤 12명을 해고했다. 노동자들은 16.5%의 임금 인상, 최저생계비 보장, 부당해고 철회를 내걸고 파업에 돌입했다. 그때 독어를 할 줄 알았던 리 신부가 독일 총리에게 후레아패션의 노동탄압 사건에 대해 편지를 써보냈다. 그 영향으로 독일에 있는 한인들이 시위를 하고, 후레아패션에서 나오는 물건이 진열된 백화점에 폭탄이 터지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그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노동운동에 대한 내 의식도 성장하게 되었다.

88년 창인동성당에 부임했을 때 익산 노동자의 집 실무자로 온 오두희를 만났다. 지금도 평화바람에서 함께하고 있는 그는 20년 넘도록 분신처럼 내 사목활동을 받쳐준 동지가 되었다.


문정현 신부
문정현 신부
그 무렵 국제정비·아세아 스와니·성일통상·태양전구·쌍방울·한성·경성고무 따위의 크고 작은 사업장에서 노조 결성과 어용노조 반대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노동자의 집으로 노동자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새로 부임한 내게 쉽게 신뢰를 보이지 않았다. 나 역시 핍박당하는 노동자들 속에 있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소통에 미숙한 점이 많았다. 그러나 노동자들과 직접 부딪치면서 그런 나 자신의 틀이 깨져나갔다. 예수께서 한없이 자신을 낮추어 소외된 이들 속으로 들어가셨던 섬김의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구술정리/김중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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