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9월 경기도 안산 반월공단의 금강공업에서 노조 농성중 경찰 진압에 맞서다 사망한 박성호·원태조 열사 분신사건은 노동사목 활동을 둘러싼 가톨릭 내부의 보수와 진보 세력간 갈등을 촉발시켰다. 사진은 당시 사건을 보도한 신문기사의 일부.
문정현-길 위의 신부 46
1990년 3월 수원교구 김남수 주교가 안산 원곡성당으로 사목 방문을 왔다. 사목위원의 본당 사목 현황을 보고받은 주교는 ‘성당의 사목 대상이 아닌 비신자가 포함돼 있다’는 이유로 노동사목을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그래도 노동사목 활동이 계속되자 6월5일 김 주교는 직접 원곡성당의 장 레이몬드 신부에게 전화를 걸어 ‘왜 계속하느냐’며 다시 중단을 명령했다. 또 그가 소속된 성골롬반 외방선교회에 전화를 걸어 “레이몬드 신부가 주교 말을 듣지 않는다”며 같은 요구를 했다.
이에 6월13일 레이몬드 신부와 원곡성당 주임신부였던 모리세이 미카엘 신부는 김 주교를 찾아가 왜 노동사목을 중단해야 하는지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김 주교는 “주교회의가 공인하지 않은 전국단체인 가톨릭노동사목전국협의회에 가입해 있고, 노동사목이 노동운동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신자인 노동자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 또 평신도는 교회 이름으로 노동사목을 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
7월30일 가톨릭노동사목전국협의회는 ‘반월 노동사목 비상실행위원회’를 열어 이 문제를 논의했다. 이어 노동사목에서 일하는 평신도 3명이 수원교구장에게 면담을 거듭 요청한 끝에 9월3일 노동사목 실무자들과 김 주교가 약 2시간에 걸쳐 대화를 했다. 그러나 서로 견해차만 확인했다.
그런데 노동사목과 김 주교가 갈등을 빚고 있던 8월30일, 반월공단에 있는 금강공업 노조원 2명이 분신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금강공업은 강판과 파이프를 제작하는 공장으로 당시 매출 신장률이 전국 10위, 반월공단 내 2위를 기록할 정도로 호황이었다. 그러나 정작 노동자들은 용접가스·쇳가루·분진·소음이 가득 찬 비좁은 작업장에서 산업재해와 살인적인 노동강도, 형편없는 저임금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에 금강공업 노동자들은 8월10일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노조는 회사 쪽과 인금인상, 노조전임자 확대 조정안을 두고 3차까지 교섭을 했지만 결렬이 되어 8월31일에 4차 교섭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8월29일 회사 쪽은 노조 간부들이 퇴근한 틈을 타 기숙사에 남아 있는 조합원들을 감금하고 10t 화물트럭 15대가량을 동원해 반월공장에 있던 기자재를 모두 옮겨버렸다. 그날 밤 기숙사에 갇혀 있던 조합원이 가까스로 탈출해 위원장에게 상황을 알렸고, 비상연락망을 통해 밤 11시쯤부터 조합원과 부인, 어린아이들까지 공장 정문 앞에 모여 농성에 돌입했다. 그러나 회사에서는 30일 새벽, 공장장 명의로 휴업공고를 내걸었다. 분노한 노동자와 가족들은 그날 오후까지 농성을 했고 오후 4시께 공권력이 투입됐다. 위기감을 느낀 노동자들이 강하게 반발하는 사이 노조원인 박성호·원태조가 몸에 시너를 부었다. 두 사람은 경찰이 다가오면 분신하겠다고 경고하며 폭력진압 중단을 요구했다. 그러나 경찰이 이를 무시하고 박 열사에게 덤벼들어 몸싸움이 벌어졌고 그 순간 불길이 치솟았다. 이때 시너가 사방으로 튀어 옆에 있던 정만교 조합원을 비롯해 신강식 위원장, 회계감사 등 6명이 더 화상을 입었다. 결국 그때 심한 전신화상을 입은 박 열사가 9월11일, 1주일 뒤 원 열사마저 숨지고 말았다. 그 사이 노동자들의 거센 시위가 계속됐고, 9월12일 시위와 진압 과정에서 불행히도 한 경찰관이 숨지는 사건까지 이어졌다.
같은 날, 노동사목 실무자들은 지역 노동자들의 요구사항과 교회는 가난한 이들과 연대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아 김 주교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주교로부터 답신은 오지 않고 13일 경찰이 원곡성당에 난입해 반월 노동사목 사무실을 영장 없이 압수수색했다. 이에 전국노동사목 실무자들은 수원교구청에서 농성을 하며 반월 노동사목의 정상화를 요구했다.
9월16일 아침 원곡성당을 방문한 김 주교는 “노동사목 활동을 중단했으면 이런 일이 없지 않았느냐”며 그 자리에 있던 사목위원에게 사무실 폐쇄를 명령하고 짐을 가져갈 때만 문을 열어주라고 말했다. 김 주교는 사건의 발단과 경위는 확인하지 않고 사태의 모든 책임을 노동사목에 지우려 한 것이다.
결국 반월 노동사목이 원곡성당에서 철수하는 대신 공간을 따로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고, 수원교구 노동사목위원회에도 참여하는 것으로 사태는 마무리됐다.
구술정리/김중미 작가
문정현 신부
구술정리/김중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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