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1월 노동사목전국협의회 지도신부로 노동사목 국제담당 실무자들을 이끌고 유럽 출장을 간 필자(왼쪽)가 영국의 천주교 노동사목 원조단체인 카포드를 방문해 실무대표 캐서린과 함께했다.
1992년 익산 창인동성당에서 금마성당으로 옮긴 것은 작은 자매의 집과 가깝기 때문이었다. 금마성당은 원래 공소였는데 81년 여산성당에서 분리되어 성당으로 승격되었다. 금마성당은 공수부대가 가까워 신자들도 군인 가족이 많았고, 예전에 박창신 신부 테러사건(‘길을 찾아서’ 26회)이 있었던 곳이라 마음 한구석 부담이 있었다.
금마성당이나 공수부대에서도 내가 본당 신부로 오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그러나 나는 신자들을 편견없이 대했다. 공수부대원 가족들도 나름대로 고충이 많았다. 부대원들은 한번 훈련을 나가면 한두달씩 집을 떠나 토굴을 파고 살며 먹을 것 없이 버텨야 했고, 겨울철에도 극한상황에서 살아남는 훈련을 했다. 그럴 때면 아내들은 남편 걱정에 더 열심히 미사를 드리고 신앙생활을 했다. 사회적 역사적 측면에서야 공수부대를 안 좋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 가족들에게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가족들이나 부대원들이 성당에 와서 떳떳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한번은 공수부대에서 변산해수욕장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수중폭파 시범을 보여줬는데 준비하는 와중에 폭발하는 바람에 부대원 3명이 즉사하고 말았다. 내가 장례미사를 해주었다. 젊은 부인들이 홀로 남게 되었으니 너무 안쓰럽고 마음이 아팠다. 그 부인들은 금마를 떠나 고향으로 간 뒤에도 나와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그 부대 안에 있다는 ‘5·18 전승기념관’ 따위는 거슬렸다. ‘군부에 의한 국민 탄압과 학살’이라는 비극의 역사를, 공수부대는 적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니 몹시 언짢았다. 그러나 신자들에게는 그런 불편한 마음을 내비치지 않아서 부딪치는 일은 전혀 없었다. 금마는 농촌 성당이었지만 장계성당 같은 공동체적 분위기는 없었다. 군사도시라서 인구이동이 많은 편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서도 어머니의 도움이 컸다. 어머니는 늘 신자들을 초대해 차와 과일을 대접하고 술잔치도 자주 베풀었다.
금마성당에 있던 93년 1월 노동사목전국협의회 지도신부로 유럽 출장을 가게 됐다. 그동안 노동사목 활동 지원을 해주는 ‘세베모’, ‘미제레오르’ 따위의 단체를 방문해서 한국의 노동운동을 알리고 국제연대를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더불어 지속적인 지원을 받고, 영국에 유학중이던 전태일 열사의 누이동생 전순옥의 장학금을 지원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가톨릭 노동사목 국제담당 실무자들과 함께 갔다.
나는 80년대 중반부터 10여년 동안 천주교의 제1세계 원조단체들이 제3세계 사람들과 파트너십을 가지고 아시아 나라들을 원조하는 기구인 ‘인간개발을 위한 아시안 협의회’(APHD)의 상임이사를 맡아 일했다. 그래서 내가 방문하는 유럽 단체의 실무자들을 잘 알고 있었다. 아마 노동사목 실무자들은 그런 내 이름이 필요했던 것 같았다. 영국에서는 노동사목 천주교 원조단체인 카포드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실무자 대표인 캐서린을 만나고, 영국 외무부에 가서 남북문제에 대해 얘기했다. 그다음 벨기에로 가서 유럽의회 의원들도 만나고, 한국 문제에 대해 토론했다. 프랑스에서는 외무부 산하 CCFD라는 단체를 찾아가 노동사목에 대한 지원을 약속받기도 했다. 전순옥의 장학금은 독일의 미제레오르에서 지원받았다.
이들 유럽의 단체들이 한국의 교회와 사회운동단체들을 지원한 이유는 박정희 군사독재 이래로 한국이 인권 사각지대였기 때문이다. 서구에서 볼 때 한국의 근대화는 산업노동자와 농민 착취를 바탕으로 이룬 허구였다. 그래서 민중들 편에 서고 독재권력과 맞서는 민주화세력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박 정권 몰락 이후에는 중요한 활동을 하는 단체와 개인을 선별해서 지원했는데 무척 큰 힘이 되었다.
유럽 방문으로 어느 정도 성과를 얻었지만 한편으로는 국제연대에 회의가 들기도 했다. 사회운동에서 국제연대는 필요한 일이다. 일시적인 지원만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신뢰를 쌓고 관계를 맺어가야 하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언어적 한계도 컸고 일회성을 극복하기 위한 활동가의 책임감이나 역량이 모두 부족했다.
구술정리/김중미 작가
문정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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