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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쉰 넘어 떠난 유학길, 남미 생태신학에 심취 / 문정현

등록 2010-08-08 21:46

1994년 초 미국 메리놀신학교 대학원으로 유학을 간 필자(오른쪽 셋째)는 주말이면 같은 석사과정 동기생들과 함께 미국 곳곳을 여행하며 50대 중반에 이르러 처음으로 재충전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1994년 초 미국 메리놀신학교 대학원으로 유학을 간 필자(오른쪽 셋째)는 주말이면 같은 석사과정 동기생들과 함께 미국 곳곳을 여행하며 50대 중반에 이르러 처음으로 재충전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문정현-길 위의 신부 50
1993년 말 뉴욕에서 돌아와 가만히 생각하니 공부를 하려면 안식년 1년으로는 부족할 것 같았다. 그래서 전주교구장 이병호 주교에게 안식년을 2년으로 늘려달라고 청했다. 며칠 뒤, 총대리 신부가 입학허가서까지 받았으니 차라리 유학을 가라고 했다. 안식년이 아닌 ‘유학’이라니 큰 부담이 되었다. 그래서 “이 늙은이가 공부를 한다면 개가 웃겠어요” 했더니 총대리 신부는 “그렇게만 생각하지 마세요. 젊은이들이라고 유학 가서 학위를 얻어갖고 오는 건 아닙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학위를 얻지 못하고 공부만 하고도 오니 잘 다녀오세요” 했다. 그래서 이듬해 엉겁결에 2년 예정으로 미국 뉴욕주의 메리놀신학교 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학위 과정은 4학기였는데 3학기는 강의를 듣고 1학기는 논문을 쓰는 것이었다. 다행히 여름학기가 있어서 1년 만에 3학기 강의를 다 듣고 1학기 동안 논문을 썼다. 날마다 4시간 강의를 듣고, 기숙사로 돌아와서는 페이퍼를 썼다. 영어를 다 알아듣지 못하니 강의시간 전체를 녹음해서 다시 듣고, 받아쓰고, 또 다시 들었다. 그래도 못 알아들으면 다른 신부들에게 강의 내용을 물어보고 페이퍼를 쓴 뒤에는 내가 제대로 썼는지 동료 학생들한테 물어봐서 다시 정리해냈다. 가끔 왜 공부를 시작했나 후회를 할 때도 있었다. 영어 강의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을 때는 “어휴, 그만 때려치워? 청강이나 할까?” 혼자 낙담하기도 했다. 또 컴퓨터가 고장나서 교수에게 제출할 리포트를 제때 작성 못하면 나 자신이 용납이 안 돼 속이 상했다. 그래도 그렇게 한 1년 지나니까 그동안 공부한 게 아까워서라도 유종의 미를 거둬야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게 되었다.

사실 나는 사회운동에 몸담기 전부터 영어에 관심이 많았다. 전주교구에서 함께 민주화운동을 하던 벨기에 신부 지정환·배영근 신부가 외국 잡지를 보며 여러 가지 새로운 신학적 정보를 얻는 것이 부러웠다. 또 최분도·시노트 신부가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주제로 외국 기자들과 자유롭게 인터뷰하는 걸 보면서 영어를 알면 운동을 하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되겠구나 생각했다. 그래서 감옥에 있는 동안에도 영어성경을 다섯번쯤 읽었다. 회화를 익히고자 일간신문의 회화코너를 손바닥만한 수첩에 오려붙여서 길을 오가는 시간에 외우기를 되풀이했다. 그렇게 하니 영어가 점점 늘었고 미국 유학 때도 도움이 되었다.

메리놀에서 내가 선택한 과정은 정의와 평화 프로그램이었다. 남미의 해방신학이 바탕이었다. 사회운동과 사제직을 병행하는 동안 꼭 하고 싶었던 공부였던 만큼 주말에도 쉬지 않고 했다. 혼자 자료를 찾다가 막히면 규현 신부에게 전화를 해서 내가 관여했던 사건이나 일에 관련된 자료를 부탁했다. 자료를 읽고 들었던 강의 주제와 내 경험을 바탕으로 논문을 쓴 뒤 영어로 옮겨 제대로 된 것인지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특히 한국에서 34년간 살았던 미국 수녀 돌로레스 기에레한테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 수녀님은 내가 한국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잘 알고 있어서 내가 영어로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것까지 찾아 고쳐주었다.

공부를 하면서 남미의 해방신학과 그동안 내가 살아왔던 삶이 한 뿌리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남미는 우리와 달리 많은 성직자·수도자들이 살해당하고 감옥에 갔지만 정치·사회적인 상황은 비슷했다. 여성신학을 공부하면서는 어느 문화권이나 가장 밑바닥에 있는 계층은 여성이라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여름학기에 들은 생태신학은 나중에 새만금, 부안 핵폐기장 문제를 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지금 4대강 개발사업의 문제가 마음속 깊이 와닿는 것도 그때의 공부가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공부하는 동안에는 잡념을 가질 새가 없었다.


문정현 신부
문정현 신부
미국에서 공부하면서도 한국 상황을 계속 주시했다. 공부는 내 삶의 연장이었다. 사제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삶이란 늘 병자와 고통받는 사람, 가난한 사람, 빼앗기고 착취당하는 사람, 어떤 이유로든 탄압받고 인간성을 상실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라 생각했기에 유학을 왔다고 운동마저 멈출 수는 없었다. 운동을 그만둔다는 것은 사제로서의 내 신원, 내 정체성이 바뀌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중심에 두고 실천하는 사제라는 신원과 영적 바탕을 저버릴 수 없었다.

구술정리/김중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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