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태평양전쟁 말기 조선인 등을 강제동원해 만든 에오로시댐 수로터널 입구. 암벽 밑으로 14.5㎞나 뚫어 연결한 난공사여서 희생자가 많았다.
[2010 특별기획 성찰과 도전] 에오로시댐·유수지 건설 터 르포
히가시카와정을 선전하는 구호로 일본 전국에서 유일하게 상수도가 없는 곳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주변 계곡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깨끗하다는 얘기가 된다. 일본 최대의 국립공원인 다이세쓰산 공원의 한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덕분이다. 보는 이의 경탄을 자아내는 아름다운 곳이지만 강제동원의 슬픈 역사가 감춰져 있다. 그것은 히가시카와정이 아사히카와와 지리적으로 인접한 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아사히카와는 홋카이도에서 삿포로에 이어 둘째로 큰 도시다.
전력생산용 댐 만드는데
몸으로 14.5㎞ 터널 파
폐석위에 시체유기 증언도 아사히카와는 1896년 북방 방어의 핵심부대로 7사단이 배치되면서 군사도시로 발전했다. 이 사단은 대한제국의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1904년의 러일전쟁에 참전했고, 러시아혁명 때는 시베리아 간섭군으로 파견됐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많은 부대가 남쪽으로 이동했지만, 7사단은 움직이지 않는 천황의 직속사단으로 패전 때까지 사단본부가 현지에 남았다. 1940년대 초반 다이세쓰공원에서 나온 수많은 지류가 합쳐져 흐르는 주베쓰천을 막아 댐을 건설하는 공사가 시작됐다. 군사도시인 아사히카와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나온 구상이다. 일본 성인 남자들은 대부분 전장에 동원됐기 때문에 조선인들을 끌고 와 사역시키기로 했다. 조선인들이 놓인 상황을 어렴풋이나마 느껴보기 위해 취수구, 수로터널 등을 관리하는 홋카이도전력의 안내를 받아 관련 시설을 둘러보았다. 터널의 규모나 지형을 보면 상상을 절하는 난공사였음을 직감할 수 있다. 터널 지름은 3.1m이고 총 길이는 14.5㎞에 이른다고 한다. 전쟁 말기라 중장비도 거의 없었을 때에 산간오지에서 주로 인간의 노동력에 의존해 대규모 토목공사를 했다면 엄청난 희생이 따랐을 것이다. 여러 곳의 취수구를 통해 모아진 물은 주베쓰천 하류에 세워진 댐으로 이동해 100m 정도 낙하하면서 전기를 만들었다. 전쟁기에 세워진 댐은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다. 상류에 새로운 댐을 건설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진상규명위)나 일본 쪽 연구자에 따르면 일제 때 이곳 댐 공사에 동원된 조선인은 800~1000명으로 추정된다. 얼마나 현지에서 숨져 묻혔는지는 추정치조차 없다. 유수지 덕 좋은 쌀 나오지만
조선인 관련자료 전혀없어
“죽어서도 차별당하는 셈” 이곳에서 쓰는 특수용어로 ‘즈리야마’라는 말이 있다. 광산이나 토건 현장에서 나온 버력들을 쌓아놓은 것이다. 조선인이 죽으면 그냥 즈리야마에 던져버렸다는 증언도 있지만 확인은 되지 않았다. 현재 진상규명위에 에오로시댐 공사에 끌려갔다고 접수된 피해신고는 15건이다. 하지만 홋카이도전력의 사사에는 조선인들이 이 댐을 건설하는 데 동원돼 희생됐다는 내용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표면상 이유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에오로시댐 공사와 상관관계에 있는 것이 유수지 공사다. 주베쓰천의 물은 눈이 녹아 내려온 것이기 때문에 아주 차다. 댐을 만들어 바로 밑으로 낙하시키면 논농사에 치명적인 냉해를 일으킨다. 그래서 농민을 비롯한 주민들이 댐 공사에 대한 보완대책을 거세게 요구했다. 그래서 물을 가둬서 수온을 오르게 한 뒤 흘려보내는 유수지 건설이 시작됐다. 이 일대에 모두 6개의 유수지가 건설됐다. 공사에 동원된 조선인은 약 1000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반면 중일전쟁 때 끌려온 중국인들의 피해 상황은 정확하게 집계돼 있다. 1944년 9월 중국인 338명이 끌려와 일본 패전 때까지 88명이 숨졌다.
히가시카와정에는 교고쿠 히로시라는 80대 후반의 의사가 있다. 신문기자들이 찾아와 일제 때 지역의 상황에 대해 물어도 침묵을 지켰던 그는 약 5년 전부터 무거운 입을 열었다. 지역에서 신망이 높은 그는 중국에서 반일시위가 갑자기 거세지자, 요즘의 젊은 세대들은 전쟁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모른다고 한탄하고 당시 중국인 노동자 집단숙소에 왕진을 다녔던 상황을 적극적으로 증언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조선인 노동자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하다가 1년 전부터 조선인 집단숙소에 갔던 얘기도 밝혔다고 한다. 히가시카와정은 홋카이도에서 가장 질이 좋은 쌀의 산지로 알려져 있다. 도정한 쌀을 캔커피처럼 진공 깡통에 담아 특산물로 팔 정도로 인기가 있다. 주민들은 중국인들의 엄청난 희생 위에 건설된 유수지 덕분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조선인들이 유수지 건설에 동원돼 온갖 고역을 치렀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주민은 거의 없다. 죽어서도 차별당하고 있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중국은 전승국이고 우리는 그런 대접을 받지 못한 탓이다. 히가시카와/글·사진 김효순 대기자 hyoskim@hani.co.kr
몸으로 14.5㎞ 터널 파
폐석위에 시체유기 증언도 아사히카와는 1896년 북방 방어의 핵심부대로 7사단이 배치되면서 군사도시로 발전했다. 이 사단은 대한제국의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1904년의 러일전쟁에 참전했고, 러시아혁명 때는 시베리아 간섭군으로 파견됐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많은 부대가 남쪽으로 이동했지만, 7사단은 움직이지 않는 천황의 직속사단으로 패전 때까지 사단본부가 현지에 남았다. 1940년대 초반 다이세쓰공원에서 나온 수많은 지류가 합쳐져 흐르는 주베쓰천을 막아 댐을 건설하는 공사가 시작됐다. 군사도시인 아사히카와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나온 구상이다. 일본 성인 남자들은 대부분 전장에 동원됐기 때문에 조선인들을 끌고 와 사역시키기로 했다. 조선인들이 놓인 상황을 어렴풋이나마 느껴보기 위해 취수구, 수로터널 등을 관리하는 홋카이도전력의 안내를 받아 관련 시설을 둘러보았다. 터널의 규모나 지형을 보면 상상을 절하는 난공사였음을 직감할 수 있다. 터널 지름은 3.1m이고 총 길이는 14.5㎞에 이른다고 한다. 전쟁 말기라 중장비도 거의 없었을 때에 산간오지에서 주로 인간의 노동력에 의존해 대규모 토목공사를 했다면 엄청난 희생이 따랐을 것이다. 여러 곳의 취수구를 통해 모아진 물은 주베쓰천 하류에 세워진 댐으로 이동해 100m 정도 낙하하면서 전기를 만들었다. 전쟁기에 세워진 댐은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다. 상류에 새로운 댐을 건설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진상규명위)나 일본 쪽 연구자에 따르면 일제 때 이곳 댐 공사에 동원된 조선인은 800~1000명으로 추정된다. 얼마나 현지에서 숨져 묻혔는지는 추정치조차 없다. 유수지 덕 좋은 쌀 나오지만
조선인 관련자료 전혀없어
“죽어서도 차별당하는 셈” 이곳에서 쓰는 특수용어로 ‘즈리야마’라는 말이 있다. 광산이나 토건 현장에서 나온 버력들을 쌓아놓은 것이다. 조선인이 죽으면 그냥 즈리야마에 던져버렸다는 증언도 있지만 확인은 되지 않았다. 현재 진상규명위에 에오로시댐 공사에 끌려갔다고 접수된 피해신고는 15건이다. 하지만 홋카이도전력의 사사에는 조선인들이 이 댐을 건설하는 데 동원돼 희생됐다는 내용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표면상 이유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에오로시댐 공사와 상관관계에 있는 것이 유수지 공사다. 주베쓰천의 물은 눈이 녹아 내려온 것이기 때문에 아주 차다. 댐을 만들어 바로 밑으로 낙하시키면 논농사에 치명적인 냉해를 일으킨다. 그래서 농민을 비롯한 주민들이 댐 공사에 대한 보완대책을 거세게 요구했다. 그래서 물을 가둬서 수온을 오르게 한 뒤 흘려보내는 유수지 건설이 시작됐다. 이 일대에 모두 6개의 유수지가 건설됐다. 공사에 동원된 조선인은 약 1000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반면 중일전쟁 때 끌려온 중국인들의 피해 상황은 정확하게 집계돼 있다. 1944년 9월 중국인 338명이 끌려와 일본 패전 때까지 88명이 숨졌다.
히가시카와정에는 교고쿠 히로시라는 80대 후반의 의사가 있다. 신문기자들이 찾아와 일제 때 지역의 상황에 대해 물어도 침묵을 지켰던 그는 약 5년 전부터 무거운 입을 열었다. 지역에서 신망이 높은 그는 중국에서 반일시위가 갑자기 거세지자, 요즘의 젊은 세대들은 전쟁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모른다고 한탄하고 당시 중국인 노동자 집단숙소에 왕진을 다녔던 상황을 적극적으로 증언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조선인 노동자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하다가 1년 전부터 조선인 집단숙소에 갔던 얘기도 밝혔다고 한다. 히가시카와정은 홋카이도에서 가장 질이 좋은 쌀의 산지로 알려져 있다. 도정한 쌀을 캔커피처럼 진공 깡통에 담아 특산물로 팔 정도로 인기가 있다. 주민들은 중국인들의 엄청난 희생 위에 건설된 유수지 덕분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조선인들이 유수지 건설에 동원돼 온갖 고역을 치렀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주민은 거의 없다. 죽어서도 차별당하고 있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중국은 전승국이고 우리는 그런 대접을 받지 못한 탓이다. 히가시카와/글·사진 김효순 대기자 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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