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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한·일 젊은이들 손잡고 5년간 유해 30~40구 발굴

등록 2010-08-11 21:49

아사지노 옛 공동묘지에서 한국과 일본의 대학생, 현지 주민들이 함께 유골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실행위원회 제공
아사지노 옛 공동묘지에서 한국과 일본의 대학생, 현지 주민들이 함께 유골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실행위원회 제공
[2010 특별기획 성찰과 도전]
② 유골 공동발굴로 맺어진 교류
사루후쓰무라 지역의 아사지노 비행장 터
일본 활동가들 노력으로 주민협조 끌어내
관에서도 숙박·교통편의 제공 최대한 협력

숲 사이로 난 도로를 달리다가 승용차가 비포장길로 들어섰다. 차가 이리저리 흔들리며 가다가 멈췄다. 경적이 몇 차례 크게 울렸다. 큰 곰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이라 운전자가 안전을 위해 예방조처를 취한 것이다. 차에서 내리니 숲 한가운데 햇살이 환히 들어오는 개활지 같은 곳이 보인다. 문화재 발굴 현장처럼 여기저기 구덩이가 있다. ‘옛 일본육군 아사지노비행장 건설공사 조선인 희생자를 애도한다’고 쓴 나무팻말이 서 있다. 아사지노 비행장은 일본 군부가 1942년부터 44년까지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해 만든 군사시설이다. 1400m와 1200m 길이의 목판 활주로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곳을 찾아오는 길은 꽤 멀다. 아사지노가 속해 있는 사루후쓰무라는 일본에서 최북단의 ‘무라’로 알려져 있다. ‘무라’는 한자로 마을 촌(村) 자를 쓰며 기초 자치단위의 하나이다. 무라의 장인 촌장과 촌의회 의원은 모두 주민들의 선거로 선출된다. 1983년 대한항공 여객기 격추사건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당시 사할린과 마주하고 있는 왓카나이란 지명이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왓카나이에서 사루후쓰무라 중심부까지는 61㎞이고, 거기서도 아사지노는 20㎞ 떨어져 있다.

사루후쓰무라의 현재 인구는 2800여명이다. 이 작은 마을에 4년 전 한국과 일본의 대학생을 포함해 300명이 모였다. 아사지노 비행장 건설 때 희생된 조선인들의 유골이 그냥 방치돼 있다는 것을 알고 두 나라 젊은이들과 현지 주민이 손을 맞잡고 발굴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한 것이다. 촌사무소까지 뒷전에서 지원을 했다는 점에서 일본에서 유례없는 실험이 벌어진 것이다.

비행장 건설에 일본인 주민과 학생들이 일부 동원되기는 했지만, 노동력의 주력은 조선인이 차지했다. 적어도 4000여명의 조선인이 끌려온 것으로 추정된다. 태평양전쟁의 주전장이 남방에 있던 관계로 비행장은 실제로 사용된 적이 없다. 하지만 조선인들이 치른 희생은 엄청났다. 인근 지역의 관청에 소장된 매·화장 인허증 기록을 보더라도 89명이 숨졌다.

조선인 희생자를 애도한다는 팻말이 세워진 곳은 옛 공동묘지 자리다. 강제사역을 하다 죽으면 활주로 공사 현장 구덩이에 그냥 던져버렸다는 증언도 있지만 확인은 되지 않는다. 대체로 마차로 주검을 운반해 공동묘지 한편에 묻거나 화장한 것으로 보인다. 촌로들의 증언에 따르면 마찻길 오른쪽에 일본인 묘지가 있었고 왼쪽에 조선인들을 묻었다고 한다. 1950년대 일본인 묘는 새로 만든 공동묘지로 옮겨졌지만 조선인 주검은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 최대의 제지회사인 오지제지가 소나무·자작나무 등의 조림을 해 일대는 울창한 숲으로 바뀌었다.


아사지노 유골 발굴 지도
아사지노 유골 발굴 지도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던 아사지노 비행장의 조선인 유골 문제가 다시 드러난 것은 활동가들의 집요한 노력에 기인한다. 옛 공동묘지 인근에 조선인 주검이 방치돼 있을 것이라는 증언을 입수한 활동가들은 2005년 가을 현지 주민의 협조를 얻어 시굴을 했다. 별다른 실마리도 없이 시도를 했는데 거의 완전한 형태의 유골 2구가 나왔다.

본격적으로 발굴작업을 벌이기로 하고 주민과 촌사무소를 상대로 설득작업에 들어갔지만 처음에는 반응이 별로 우호적이지 않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외부의 말썽꾼들이 몰려와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경계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게다가 한국에서 대학생들이 대거 들어오면 마을 청년들과 반드시 충돌이 벌어질 것이라고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아사지노 자치회와 사루후쓰무라 상공회의소 회원들이 협조하겠다고 나서면서 여론의 풍향이 바뀌기 시작했다. 2006년 8월 여름방학 기간을 이용해 1차 본격발굴이 시작됐다. 25~30㎝만 파 들어가도 뼛조각들이 제법 나왔다. 일본인과 달리 조선인이 죽으면 땅을 대충 파서 묻었기 때문이다. 이후 2009년과 2010년 두 차례 더 본격발굴이 이뤄졌다. 여러 구의 주검을 그냥 던져 버렸는지 포개진 채로 나온 것도 있다. 점토질 토양이라 나무뿌리가 밑으로 뻗지 못하고 옆으로 나가면서 유골을 감싸 버린 것도 있었다. 이제까지의 발굴 성과는 모두 30~40구다. 유골은 인근 하마톤베쓰에 있는 덴유(천우)사라는 절에 안치돼 있다.


발굴작업을 통해 한국과 일본의 젊은이들이 상호이해를 높이고 화해의 길을 모색할 수 있다는 것이 입증되면서 관의 태도도 크게 바뀌었다. 2006년 1차 발굴 때 사루후쓰무라의 교육장은 수상한 사람들이 몰려오니 학생들과의 접촉을 막으라고 지시했다. 발굴 주최쪽에서 현지 학교들과 교류하고 싶다고 제안을 하자,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학교에 경비까지 붙였을 정도다.

지난해 12월 선거에서 당선된 다쓰미 아키라(55) 촌장은 촌의회 의원으로 재직하던 시절, 발굴작업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5월 초 4일간 진행된 3차 발굴작업 때는 날마다 현장을 방문하는 등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다쓰미 촌장은 전체 과정을 보면 현지의 실행위원회가 행정당국을 끌고 갔다고 말했다. 이전의 발굴 때도 촌사무소는 스포츠센터, 노인관 등을 일시적으로 비워 숙박시설로 내놓거나 교통편의를 제공하는 등의 협력을 했다. 주민 가운데는 가족 단위로 참여한 이들도 있다. 촌사무소의 오이쿠보 아쓰시 계장은 소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작업에 참여했다. 밤에 화장실 가기도 무서워하던 아이들이 발굴된 유골을 깨끗하게 닦아내는 일을 열심히 했다고 말했다.

아사지노 비행장 터는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일대가 전부 목장으로 바뀌어 넓은 목초지 위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는 젖소들만 보인다. 현지인의 설명을 듣지 않으면 군용기를 숨겨두기 위한 엄체호 등의 흔적을 보더라도 알아차릴 수 없다. 조선인 희생자의 유골과 평화로운 젖소의 모습, 너무나 대조적이다.

사루후쓰무라/글·사진 김효순 대기자 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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