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부터 ‘군산 미군기지 우리땅 찾기 시민모임’ 대표를 맡은 필자는 기지 정문 앞에서 매주 수요집회를 열어왔다. 당시 기아특수강을 비롯한 군산지역 5개 파업사업장의 노동자들이 참석해 이른바 ‘품앗이 투쟁’을 벌였다.
문정현-길 위의 신부 58
1999년 2월 군산 오룡동성당을 끝으로 사목활동을 그만두고 익산의 자매의 집 운영에만 전념하면서도 군산 미공군기지 앞에서 열리는 수요집회에는 꼬박꼬박 참여했다. 그즈음 군산에서는 생존권을 둘러싼 갈등이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기아특수강, 개정병원, 카캐리어, 군산대, 문화택시의 5대 사업장에서 해고자 복직 연대투쟁이 벌어졌다. 하루는 기아특수강의 노동자인 이재현과 조성옥이 최종수 신부를 통해 군산 미군기지 활주로 사용료 문제로 시민들이 싸움을 하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는 ‘품앗이 투쟁’을 하자고 제안해왔다. 그때부터 수요집회를 끝내고 다함께 자장면을 먹은 다음 오후에는 파업을 하는 사업장마다 돌아다니며 지지 투쟁을 하게 되었다.
기아특수강은 원래 기아자동차 계열회사였는데 97년 부도가 나면서 구조조정을 명분으로 노동자들을 대거 정리해고했다. 정리해고를 하더라도 노동법에 따라 근속연수가 짧은 사람부터 자른다거나, 근무가 불성실한 사람부터 자른다는 따위의 기준을 지켜야 한다. 하지만 회사는 어용노조를 민주화하기 위해 활동하는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정리해고를 했다. 노동자들은 그때부터 회사를 상대로 정리해고의 부당성을 알리면서 싸우기 시작했다. 정리해고자 103명이 ‘기아특수강 해고자 복직투쟁위원회’(위원장 김상배)를 결성해 1년6개월 가까이 줄기차게 투쟁했다. 그 과정에서 6명이 구속되었고, 끝내는 10명 정도만 남았지만 싸움을 계속했다. 구속노동자들은 풀려난 뒤에도 회사 앞에서 천막농성을 계속했다.
주위 사람들은 기아특수강 노동자의 싸움을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고 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우리의 싸움이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면 던진 계란의 흔적이라도 남기자”며 버텼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양계장을 지나던 내가 퍼뜩 생각이 나서 부화하고 남은 썩은 계란을 구해왔다. 미군기지와 기아특수강 집회 때 그걸 던졌더니 큰 싸움이 나서 경찰들이 폭력진압을 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많이 다쳤다. 그 일로 당시 중대장과 중대원들이 모두 전주로 발령이 나버렸다.
한번은 집에서 낮잠을 자다가 그날이 대보름이란 사실이 떠올랐다. 대보름이면 오곡밥을 먹고 쥐불놀이를 하니까 미군기지 앞에서도 대보름 놀이를 하며 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파트단지를 돌며 분유 깡통을 주워 못으로 구멍을 뚫고 철사를 꿰서 가져갔다. 그러고는 기아특수강 해고노동자들과 함께 미군기지 앞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쥐불놀이를 하며 한바탕 놀았다. 그러자 미군들이 깜짝 놀라서 소방차를 부르고 경찰까지 몰려왔다. 갑자기 비상이 걸려 온 경찰들은 방한복도 미처 준비하지 못해 추위에 떨었다. 그러나 우리는 논에 남아 있던 짚을 모아 쥐불을 놓고 한바탕 더 놀았다. 그러자 동네 어린이들도 몰려와 함께 놀았다. 이렇게 해서 그 뒤 해마다 기지 앞에서 대보름 놀이가 열리고 있다.
나는 수요집회를 갈 때마다 차 트렁크에 빈병 따위를 싣고 가 기지 안으로 던졌다. 미군들이 오폐수 문제를 처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싸우다 보니 미군들은 내가 나타나기만 하면 기지 정문을 닫았다. 그러던 어느날 정문 앞에서 밤이 되도록 농성을 하고 있는데 아메리카 타운의 상인들이 버스 2대에 나눠 타고 농성장으로 왔다. 그들은 우리 때문에 장사가 안 된다며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상인들과 싸움이 벌어질 것 같아서 나는 기지 울타리 옆에 있는 개집 위로 올라가 빈병과 돌 따위를 던지며 미군들을 향해 영어로 연설을 했다. 그대로 놔두면 큰 문제가 생길 것 같았는지 경찰은 기지의 울타리 철조망을 걷어내고 개집을 끌어내서 나를 강제로 차에 태워 익산 자매의 집까지 데려다 놓았다. 그러나 나는 다시 군산 기지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경찰의 무리한 진압에 항의하기 위해 군산경찰서로 가서 밤샘농성을 하기로 했다. 그 시간이 자정 무렵이었다. 경찰은 강압적으로 우리를 해산시키려 했다. 그래서 기아특수강 노동자들이 가지고 다디던 이불을 경찰서 앞 도로에 깔고 경찰서장의 사과를 요구하면서 밤샘농성을 했다. 당시 민주노동당을 대표해서 지지방문을 했던 김혜경 당시 부대표도 이때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허리를 심하게 다쳐 오랫동안 고생했다. 구술정리/김중미 작가
문정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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