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7월 군산 미공군기지 수요집회를 함께 해온 기아특수강 노조원들이 시위 중 잡혀가자 필자가 가장 번화가인 옛 군산시청 현관에서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다.
문정현-길 위의 신부 59
사실 군산 미군기지 투쟁은 엄청난 싸움이었다. 2000년 6월 주한 미대사관 쪽 요청으로 소파(SOFA·한미주둔군지위협정)개정국민행동 간부와 함께 서울 인사동에서 미국 부대사 일행을 만난 적이 있다. 그들은 군산 기지에서 올라오는 보고를 보면 놀랍다며 ‘왜 시위대와 함께 돌·쓰레기·병을 던지느냐’고 물었다. 그 질문에 나 스스로 ‘왜 그렇게 악착같이 싸우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때 나는 미군의 성채가 너무 거대하고 단단하다는 걸 온몸으로 실감하고 있었다. 미군에 공문서를 보내봤자 수취인 불명으로 돌아오니 미군기지는 미국 땅이나 마찬가지였다. 소통할 방법이 없었다. 병이나 돌을 던지면 한국 경찰이 내 온몸을 군홧발로 짓밟았지만, 그러나 그렇게라도 저항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특히 나와 기아특수강 노동자들은 서로 의기투합해서 한번 싸움을 시작하면 끝장을 보고야 말았다. 한번은 기아특수강 노동자가 경찰서에 조사를 받으러 갔다가 한 경찰관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문건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조직표가 그려져 있었는데 가만 보니 맨 위에 내가 있고 좌우에 기아특수강 노동자와 군산 노동자의 집 활동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단다. 그럴 정도로 우리의 행동이 워낙 유별나고 지독해서 다른 활동가들은 뒤로 물러나 관망만 하거나 비판을 하기도 했다.
기아특수강 노동자들은 폐차 직전의 ‘봉고차’에 프로판가스·밥솥·침낭 그리고 온갖 집회용품을 싣고 다니면서 언제 어디서나 농성을 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회사가 노동자들의 요구를 철저하게 묵살하는 상황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자신들이 죽기 전에는 절대로 포기할 사람이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직장에서 부당하게 해고된 자신들의 새로운 직업은 복직을 위해 싸우는 일이라고 말했다.
1999년 7월에는 기아특수강 정문 앞 망루에서 농성을 하던 노동자들과 회사 쪽이 격한 충돌을 빚어 집행유예 상태였던 김상배 위원장과 김정기가 다시 구속될 위기에 처했다. 그 소식을 들은 나는 무조건 익산의 집을 나섰다. 군산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에 있던 옛 군산시청에서 현관으로 쓰던 발코니를 은신처 삼아 단식농성을 벌였다. 그러자 내가 걱정이 되었던지 시민사회단체에서도 요구조건을 적은 대형 걸개를 건물에 걸어놓고 지지 농성을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경찰 기동대와도 자주 부딪치고 가끔은 회사 직원들과 그 가족들이 와서 “문정현은 성당으로 돌아가라, 물러나라” 따위의 손팻말 시위를 하고 가기도 했다. 그때 농성을 하던 군산시청 앞에는 하필 ‘이성당’이라는 유명한 빵집이 있었다. 단식하고 있으니 아침마다 빵 굽는 냄새가 어찌나 맛있게 나던지 먹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결국 단식 중에 심장병이 도져서 군산의료원에 입원했다. 당시 군산 경찰서장은 비교적 나에게 호의적인 편이었는데 병원으로 찾아와서는 제발 단식을 풀라고 권했다. 내 건강을 걱정한 주변 동지들도 만류해 일주일 만에 단식을 풀었다.
기아특수강의 끈질긴 싸움은 마지막까지 남았던 노동자 10명 가운데 8명이 복직이 되는 것으로 끝났다. 98년 정리해고 때가 아닌, 91년과 94년 노조활동을 이유로 해고된 이재현·조성옥만 복직에서 빠졌다. 이재현은 조합원들에게 실시한 설문조사와 관련해, 조성옥은 임금 교섭과 관련한 노사 합의에 항의해 조합원들에게 유인물을 배포했다는 이유로 해고됐었다.
조성옥은 2000년 해고자 복직투쟁 와중에 결혼식을 올렸다. 신부 코넬리아는 독일인으로 군산대에서 독일어를 가르치는 강사였다. 대학 때 배낭여행을 와서 한국에 매료돼 정착한 뒤, 시내 한 책방에서 신랑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된 것이었다. 코넬리아는 한국의 문화와 생활을 이해하고 받아들였고 무엇보다 남편의 노동운동이 정의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이해했다. 나는 오히려 그것이 몹시 안쓰러웠다.
내가 주례를 맡았는데 결혼식 시간을 착각해 그만 30분이나 늦었다. 그래서 도착해보니 하객들이 점심을 먼저 먹는 진풍경이 벌어져 있었다. 주례사를 하려는데 앞으로 두 사람이 살아갈 날이 얼마나 어려울지 상상이 되자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동안 수없이 주례를 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진심을 담았다. 그러다 끝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러나 신랑신부는 결혼하는 것이 그저 좋아 마냥 싱글벙글했다. 그날 결혼식은 여러가지로 잊을 수가 없다.
구술정리/김중미 작가
문정현 신부
구술정리/김중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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