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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불평등한 한미관계 ‘SOFA’에 눈뜨다 / 문정현

등록 2010-08-22 22:03

1999년 10월6일 ‘불평등한 소파(한미주둔군지위협정) 개정 국민행동’ 창립과 함께 대표를 맡은 필자(가운데)가 10월12일 회원 20여명과 함께 서울 세종로 주한 미국대사관 후문 앞에서 불평등한 소파의 개정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9년 10월6일 ‘불평등한 소파(한미주둔군지위협정) 개정 국민행동’ 창립과 함께 대표를 맡은 필자(가운데)가 10월12일 회원 20여명과 함께 서울 세종로 주한 미국대사관 후문 앞에서 불평등한 소파의 개정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문정현-길 위의 신부 60

10년이 넘도록 복직투쟁을 하던 군산 기아특수강의 이재현·조성옥은 2003년 11월부터 이듬해 봄까지 132일 동안 50m 높이 굴뚝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농성을 했다. 새로운 일자리를 마다하고 복직투쟁만 해온 두 사람의 마지막 선택이었다. 1997년부터 법정관리 상태에 있던 회사가 세아 컨소시엄과 계약 체결을 남겨둔 때였다. 3자 인수 전 복직문제를 마무리 짓지 못하면 더 미궁으로 빠질 수도 있었다. 고공농성을 해도 진전이 없자 두 사람은 단식을 시작했다. 전북지역 사회단체들은 대책위원회를 꾸리고 협상을 시도했다. 그래도 해결이 나지 않았다. 나도 2004년 3월3일부터 릴레이 동조단식에 나섰다. 어떻게든 그 싸움을 매듭지어야 했다. 두 사람은 노동자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싸웠다.

2004년 3월16일 굴뚝농성은 회사와 전격 합의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조성옥의 복직만 이루어지고 이재현의 복직은 나중에 논의하기로 했다. 그로부터 5년 뒤인 2009년 9월30일에야 두 사람은 신규채용 형식으로 옛 기아특수강인 세아베스틸에 재입사할 수 있었다. 회사 쪽은 이들에게 만 56살 정년까지 보장하기로 했다. 이재현은 정년까지 남은 8년간 사무기술직으로, 조성옥은 8년은 사무기술직, 나머지 2년은 기술직으로 일하기로 합의했다.

그렇게 끈질긴 투쟁 끝에 노동자의 명예회복을 이루어낸 기아특수강 노동자들은 99년 10월 내가 ‘불평등한 소파(SOFA·한미주둔군지위협정) 개정 국민행동’ 대표로 나선 이래 미대사관 앞·대추리·용산 등 투쟁하고 있는 현장엔 꼭 찾아와 지지해줬다. 명절에도 꼭 찾아와 지금까지도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군산 미군기지 싸움 덕분에 나는 다시 한번 유죄 판결을 받게 되었다. 99년 8월7일 저녁 침묵시위를 벌이던 중 미군기지 정문이 잠시 열렸을 때 발을 들여놓았다가 미군 헌병한테 끌려가 수갑을 차는 곤욕을 치렀다. 내가 미군 헌병에게 끌려가는 것에 항의하던 노동자의 집 활동가 오두희와 김민아는 팔과 다리에 피멍이 들었다. 미군에게 끌려간 나는 몸수색을 당하고 사진까지 찍히는 모욕을 당했다. 미군 쪽에서는 내가 기지에 무단침입을 했다 하지만 이미 여러 차례 미군에게 공문을 전달하기 위해 정문을 통과해 위병소까지 간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때 미군의 행동은 과잉방어였다. 한국 경찰로 넘겨진 뒤 다음날 새벽 2시쯤 풀려났지만 경찰은 불법침입 혐의로 불구속 입건하고 소환장까지 발부했다. 활동가 두 사람은 무혐의를 받았지만 나는 그 뒤 9번의 재판 끝에 2001년 12월1일 ‘96년 바르샤바에서 범민족대회 논의차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장과 회합한 것과 99년 8월 군산 미군기지 앞에서 폭력을 행사한 점이 인정된다’는 전혀 엉뚱한 혐의로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내가 유죄 판결을 받은 진짜 이유는 소파 개정과 매향리 폭격장 폐쇄를 주장하며 반미투쟁을 이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3년간의 미군기지 싸움을 통해 소파의 불평등성을 실감하게 됐다. 불평등한 협정에 묶여 미군기지에서 발생하는 갖가지 피해나 미군의 범죄에 대해 한국 정부는 어떤 책임도 물을 수 없었다. 이런 모순은 군산만의 일이 아니라 미군기지가 있는 이 땅 곳곳의 문제이며, 오키나와·괌·하와이·타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문정현 신부
문정현 신부
소파는 91년 한차례 부분적으로 개정이 되긴 했으나 그 대신 주한 미군에게 엄청난 방위비 분담금을 지원하게 되었고, 92년 10월 동두천에서 일어난 ‘윤금이씨 피살사건’을 계기로 95년 개정 협상이 다시 시작됐지만 미군 쪽의 비협조로 97년부터 중단됐다. 당시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는 대통령에 당선되면 중단된 협상을 재개해 소파 개정을 하겠다고 공약했다. 99년 국민행동에 나선 것은 국제적으로도 미국의 신자유주의 정책과 군사 패권주의 확장에 따른 제3세계 국가들의 저항이 일고 있어서 이때가 소파 개정을 끌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구술정리/김중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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