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1일 불평등한 소파 개정 국민행동은 경기도 화성 매향리 합동소음대책위원회의 요청을 받아 매향리 미군 사격장 기지를 한바퀴 답사하는 평화순례에 나섰다. 필자(맨 앞)와 최종수 신부(그 뒤)를 필두로 주민들이 경찰의 저지선을 피해 논길을 걷고 있다.
문정현-길 위의 신부 63
불평등한 소파 개정 국민행동은 1999년 11월 공청회를 열어 현장의 소리를 듣는 자리를 마련했다. 그때 참석했던 매향리 합동소음대책위원회의 전만규 위원장이 매향리의 실상을 전하며 자신이 오토바이를 타고 폭격장으로 가서 미군 폭격기의 표적이 되겠다는 말을 했다. 그것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겠다는 ‘비장한 각오’였다. 전 위원장의 이야기를 들은 우리는 직접 매향리에 가보기로 했다.
2000년 2월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매향리에 도착한 국민행동 일행이 맨 처음 간 곳은 대책위 사무실이었는데 바로 길 건너에 철조망이 쳐져 있고 붉은 깃발이 나부꼈다. 그 깃발이 올라와 있으면 미군이 언제든지 사격을 할 수 있는 신호라고 했다. 조금 있으니 F15기와 A10기가 날아올랐다. F15기의 소리는 좀 무겁지만 예민했다. F15기를 그때 처음 보았는데 무서웠다. 전투기가 얼마나 낮게 날아오는지 전투기에 탄 조종사 모습이 보일 정도였다. 손을 좀 길게 내밀면 내 손에 잡힐 것 같았다. 그 전투기가 “부앙”거리면서 “다다다” 소리를 내면 먼지가 확 일었다. “야! 이게 매향리구나. 정말 이런 데서 어떻게 살 수 있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전투기는 매향리에서 약 18㎞ 떨어진 섬에다 폭격 연습을 하는데, 그때는 섬을 두세 바퀴 돈 뒤 북쪽에서부터 남쪽을 향해 폭격을 했다. 항상 2~4대가 편대를 이뤄 사격하고 폭격도 했다. 폭탄이 터지면 섬광이 일고 먼지가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랐다. 그곳이 바로 ‘쿠니 사격장’이었다.
매향리에 미 공군의 해상 사격장이 들어선 것은 1951년 8월이었다. 한-미 행정협정이 체결된 이듬해인 68년에는 육상 사격장도 생겨났다. 폭격장은 모두 728만평인데 690만평의 해상 폭격장과 38만평의 육지 폭격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매향리 앞바다에는 원래 구비섬·위섬·농섬이 있었는데 그 섬들이 모두 미 공군의 사격장이 되었고 그 가운데 구비섬은 대형 폭탄의 계속된 폭격으로 뭉개져 없어져 지도에만 나오는 유령섬이 되어 있었다.
사격장 구역 안에는 300여가구가 일구는 농토가 50만평이나 있었다. 국방부에 임차료까지 내는 땅이었다. 하지만 농번기라도 사격훈련이 이어지는 때는 출입조차 할 수 없었다. 그때까지 미군의 오폭이나 불발탄 때문에 사격장 주변 마을 주민 13명이 숨졌고 22명이 중상을 입었으나, 주한미군은 67년 조개를 캐다 포탄에 맞아 현장에서 죽은 임신 8개월의 여성 사건만 자신들의 사고로 인정했다. 그보다 심각한 것은 ‘150㏈(데시벨)이나 되는 포격 소음에 만성적으로 노출돼 있는 주민들의 일상’이었다. 마을 주민 대부분이 청각장애를 겪고 있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우리가 다녀온 뒤 3월 매향리의 전 위원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주민들이 다 같이 투쟁에 나서기로 했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그래서 국민행동 회원 40~50명이 모여 매향리로 갔다. 주민들은 88년부터 마을 청년회가 주축이 되어 ‘합동소음대책위원회’를 구성한 뒤 10년 넘게 미군과 싸워오고 있었다. 그런데 매향리에서 만난 주민들은 전 위원장의 생각과 달라서 대책위에 결합을 하지 않고 구경꾼처럼 바라만 봤다. 그래도 그냥 돌아갈 수는 없어서 정문에서 후문까지 기지를 한번 돌아보기로 했다. 망설이는 주민들을 보면서 국민행동 사람들을 이끌고 앞장섰다. 농섬이 보이는 바닷가까지 걸어갔다. 해변에는 기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철조망을 쳐놓았고 이미 전경들이 도착해 막고 있었다. 함께 간 사람들은 전경이 길을 막자 구호를 외치고 돌아서 가려 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농섬에서 포탄이 터지고 있었다. 포탄의 섬광과 굉음을 눈과 귀로 확인하고 나니 그냥 물러설 수가 없었다. 50년 동안 계속된 불합리하고 오만한 미군의 폭력 앞에서 고통받는 주민들이 떠올라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끝장을 보겠다는 각오로, 절벽을 타고라도 올라가기로 했다. 내가 지팡이까지 들고 깎아지른 절벽을 오르기 시작하자 나머지 사람들도 300m쯤 되는 절벽을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절벽 꼭대기에 올라서서는 내려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이미 해는 떨어져 어두워지고 있었다. 같이 올라간 사람들이 나를 설득해 자장면을 시켜서 먹고 내려오기로 했다. 우리가 올라온 방향의 반대편은 길이 나 있어 자장면 배달이 가능했다. 어두워 잘 보이지도 않는 퉁퉁 불은 자장면을 먹고 밤이 되어 내려왔다. 그렇게 매향리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고 온 우리는 서울지역에서 평화통일운동을 하는 활동가들에게 매향리의 실상을 알렸다. 구술정리/김중미 작가
문정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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