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9월 추석 무렵, ‘매향리 미공군 국제폭격장 철폐를 위한 주민대책위원회’ 전만규(당시 44) 위원장이 아이를 안은 채 창문을 넘어 사무실 출입을 하고 있다. 화성군에서 대책위 사무실을 ‘불법 건물’로 철거할 것을 명령하면서 정문이 잠겨 있던 상황이다.
문정현-길 위의 신부 65
2000년 6월6일 매향리 미군 폭격장 폐쇄를 위한 평화대행진은 그해 2월 창간한 <오마이뉴스>가 인터넷을 통해 생중계하듯이 보도를 했다. 접속률이 늘면서 매향리 문제가 전국적인 관심사로 번져나갔다. 이를 통해 인터넷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경찰은 그날 철조망을 자른 것을 빌미로 불법집회를 했다고 꼬투리를 잡아 그 뒤의 집회는 허락을 하지 않았다.
6월17일 매향리 폭격장 폐쇄 2차 범국민 결의대회가 열리자 경찰은 경기도 발안 톨게이트에서부터 매향리로 들어오는 길목 곳곳에 전경차를 대놓고 차량통제와 불심검문을 하며 원천봉쇄를 시도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십리, 이십리 길을 돌아서 남양만 방조제를 건너고, 논두렁 밭두렁을 걸어 매향리로 모여들었다. 매향리가 고향인 인기가수 안치환씨도 이날 참석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그러나 미군은 6월19일부터 폭격을 재개했다. 이를 막고자 이튿날 새벽 대학생 6명이 평소 주민들이 잘 다니지 않아 경비가 소홀한 갯벌을 이용해 농섬으로 들어갔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그러자 최종수 신부와 대학생 1명이 정오 무렵 썰물 때에 맞춰 역시 갯벌을 통해 농섬에 들어가기로 했다. 큰 플라스틱 통에 옷가지를 넣어 끈을 허리에 맨 이들이 푹푹 빠지며 어렵게 농섬 가까이 다가가자 미군은 기총사격과 폭탄 투하 훈련을 했다. 최 신부한테 전화가 와서 받아 보니 공포에 떨고 있었다. 그들은 그런 공포 속에서도 미군의 총성이 잠시 멈춘 사이 농섬에 올라가 태극기를 들었다. 오연호 오마이뉴스 사장이 최 신부와 전화통화를 시도했다. 최 신부가 오 사장에게 물은 첫마디는 “보여요? 태극기가 보입니까?”였다. 이들은 결국 화성경찰서로 연행됐다. 뒤이어 내가 소파개정 국민행동 회원들과 경찰서에 도착했을 때 최 신부는 하도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그는 ‘내 땅을 내가 밟았는데 우리나라 경찰에게 끌려온 것이 너무 분하고 자신들이 농섬에 있는 것을 알면서도 미군이 폭격을 멈추지 않아 몹시 두려웠다’고 했다.
그 뒤로도 매향리 싸움은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내가 ‘길 위의 신부’라는 이름을 얻은 것도 그때였다. 익산 자매의 집에서 매향리까지 오가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어떤 때는 일주일에 서너번씩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기도 했다. 몸이 힘들어도 매향리 싸움에 악착같이 동참한 것은 매향리에서 직접 목격한 한-미간의 불평등한 관계와 주민들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매향리 주민들이 50년 가까이 받은 고통은 비인간적인 것이었다. 그걸 모르고 살았다는 것이, 혹은 알면서도 무관심하게 살아왔다는 것이 스스로 용납이 안 되었다.
매향리 투쟁에서 잊지 못할 사람은 전만규 위원장이다. 그는 집념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폭격장 폐쇄 투쟁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내내 공갈과 회유가 없지 않았을 텐데도 주민들을 모아 투쟁을 벌이며 시민사회단체의 연대를 이끌어냈다. 그는 88년부터 2년에 걸쳐 폭격장 점거 농성을 하면서 그때마다 연행과 석방을 되풀이했다. 89년 3월에는 미군에서 폭격장 시설을 보호한다며 주민들의 출입을 막고 농사도 못 짓게 한 적도 있었다. 그러자 주민들은 분열되기 시작했다. 이어 4월 국방부 차관을 만나 대책을 따졌으나 시원한 답변을 듣는 대신 시위를 자제하면 영농허가를 내준다는 약속만 받았다.
그런데 한달 뒤, 미군은 폭격장 안에 있는 전 위원장의 논과 모판에 트럭 4대분이나 되는 돌과 흙을 퍼부었다. 시위를 주도한 데 대한 ‘보복’이었다. 미군은 이를 따지는 주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전 위원장과 백동현 부위원장을 구속했다. 두 사람은 1심에서 징역 1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8개월 동안 수감돼 있다가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렸났다.
전 위원장은 그 뒤로도 계속 미군 기지를 상대로 외롭게 투쟁을 했고 99년 국민행동과 만나면서 매향리 싸움을 크게 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끝내 매향리 폭격장 폐쇄를 이끌어냈다. 그는 현장에서 자생적으로 큰 지도자였다. 그러나 그를 제대로 지원하지 못하는 우리의 한계가 안타까웠다.
구술정리/김중미 작가
문정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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