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7월31일 ‘매향리 미군국제폭격장 폐지를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 고문으로 소파 개정 운동에 앞장섰던 서 로벨토(본명 로버트 스위니) 신부의 추도식이 명동성당에서 열려 상복을 입은 매향리 주민들이 분향을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문정현-길 위의 신부 66
경기도 화성의 매향리 폭격장 폐쇄 싸움을 하면서 잊을 수 없는 이는 서 로벨토(로버트 피터 스위니) 신부님이다. 미국에서 태어나 1959년 사제서품을 받은 뒤 로마교황청 그레고리안대학에서 유학하고 성골롬반 외방전교회 선교사로 64년 한국으로 왔다. 그 뒤 빈민운동과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면서 본당신부 생활을 하다가 88년부터 99년 5월까지 충남 당진의 한 시골마을에서 작은 오두막에 살며 농촌사목을 했다. 유난히 키가 컸는데 방은 너무 작아 발을 뻗지 못한 채 사선으로 누워 잘 정도였다. 사회정의와 노동인권에 관심이 많았던 그분은 그렇게 검소한 생활을 몸소 실천했다.
매향리 싸움 이전에도 서 신부와 안면은 있었다. 특히 동생 문규현 신부와는 광주 대신학교 시절 영어교사로 사제지간이기도 했다. 그는 99년 10월부터 골롬반의 정의평화위원회에 일을 맡게 된 뒤 불평등한 소파 개정 국민행동에서 주도하는 미국대사관 집회에 꼬박꼬박 나오고 매향리 싸움에도 결합을 했다. 매향리는 당진 매산리와 아산만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지역이었다. 서 신부는 그곳에서 10년 동안 살면서도 이웃 매향리의 고통을 몰랐던 것을 애통해했다.
매향리 폭격장 입구에는 ‘프로그램 디렉터 록히드마틴’이라는 팻말이 있었는데 우리는 미처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고 있었다. 그곳이 바로 미국의 군수산업체가 폭탄을 만든 뒤 시험을 하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려준 서 신부는 록히드마틴사에서 신무기를 만들어 한국에서 실험을 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분노했다.
서 신부가 미국인이라고 해서 매향리에 드나드는 게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다. 당진에서부터 집회에 참가하러 오려면 경찰의 저지를 피해 때로는 물을 건너고 논두렁으로 돌고 돌아 와야 했다. 거대한 몸집이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되고, 바지는 진흙투성이에다 물에 젖어 축 늘어진 채 뚜벅뚜벅 걸어오는 그분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신기해하면서도 무척 좋아했다. 한번은 우리가 농담으로 바지를 잘라서 입고 오면 좋겠다니까, 진짜 그 바지를 잘라서 반바지로 입고 오기도 했다.
서 신부는 선교사로서, 골롬반 외방전교회의 정의평화위원장으로서, 또 한편으로는 한국사람이 되어 매향리 싸움에 결합했다. 한번은 미국대사관에 성명서를 전달하려는데 경찰의 제지가 너무 심해 몸싸움이 일어났다. 서 신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경찰들이 사람들을 들어서 밖으로 쫓아내는데 그의 덩치가 하도 크니 혼자서 들 수 없어 경찰 여럿이 신부의 팔다리를 들어서 내쫓았다.
우리는 매향리 싸움을 하는 동안 서 신부가 직장암을 앓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가까운 사람들한테조차 전혀 알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2000년 7월29일 몇몇 지인들과 강원도로 휴가를 가는 길에 병세가 악화했다. 원주 가톨릭병원에서 서울성모병원으로 옮겨 수술을 했지만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소식을 듣자마자 병원으로 달려가 서 신부의 손을 잡고 말했다. “신부님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신부님은 미국사람이지만 그동안 한국사람이 되었습니다. 혹시 가시더라도 저희를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저도 가시는 신부님과 함께하겠습니다.” 서 신부는 그날 밤 운명했다.
서울성모병원 영안실에서 장례를 치르고 명동성당에서 성골롬반회 주재로 장례미사를 했다. 매향리 주민들과 우리 국민행동에서는 그분의 뜻을 기리기 위해 노제를 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골롬반회에서는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추모제를 한 뒤, 수도회의 자체 예식대로 하고 싶어 했다. 경찰도 운구차만 보내고 우리가 탄 장례차는 충정로 고가도로 밑에서 차단했다. 운구차가 용인 성직자 묘지로 떠난 뒤, 남은 우리라도 미국대사관 옆 시민열린마당에서 추모예식을 하겠다고 하자 경찰은 상복을 입고 온 매향리 주민들을 핑계삼아 허락하지 않았다. 그날 매향리 주민들이 상복을 입은 것은 서 신부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그날 우여곡절 끝에 시민열린마당에서 조촐하게 노제를 지내고 커다란 서 신부의 영정을 들고 명동성당까지 걸었다.
지금도 그분 생각이 많이 난다. 서 신부님 덕분에 외롭지 않았다. 언제나 유머가 넘치고 재미있는 분이었다. 그리고 정확한 직관력이 있는 분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의 평화운동에 활력을 주었다. 매향리 철조망 앞에서 풍선을 들고 “양키 고 홈”을 외치던 서 신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구술정리/김중미 작가
문정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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