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9월 불평등한 소파 개정 국민행동의 대표단은 미국내 활동을 마친 뒤 10월초 같은 처지인 푸에르토리코의 비에케스 미군 폭격장을 방문했다. 필자(맨 왼쪽)가 비에케스의 아픔에 동참하고자 40일째 단식투쟁중인 미국인 평화운동가(왼쪽 둘째)를 격려하고 있다.
문정현-길 위의 신부 68
불평등한 소파 개정 국민행동 대표단은 2000년 9월26일 워싱턴디시의 국무부 앞에서 자주민주통일 미주연합 워싱턴지부와 공동으로 집회를 열었다. 참석자는 불과 15명 남짓이었고 비마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그때 국무부를 지키는 경찰이 다가오더니 전달할 문서가 있으면 따라오라고 했다. 워싱턴 동포 청년단체인 ‘우리문화 나눔터’의 조현숙 회장이 국민행동의 요구안을 들고 가자 정문에서 국무부 한국담당 관리가 나와서 둘이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 그걸 보고 내가 지팡이를 짚고 다가가자 갑자기 그 관리가 건물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조 회장이 말하기를 “저 사람이 여기로 온다. 난 저 사람을 잘 알고 있다”며 갑자기 도망을 갔다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일행들이 깡패 신부의 명성이 여기까지 알려진 것 같다며 크게 웃었다.
국무부 앞에서 40분간 집회를 하고 풍물을 치면서 백악관 앞까지 걸어가 시위를 마무리했다. 그런데 그때 <에스비에스>(SBS)에서 전화 인터뷰를 요청했다. 기자가 “소파 개정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느냐?”고 물어서 “보다시피 국무부와 백악관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다”고 대답했더니 “신부님이신데 본당은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라는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나는 본당사목을 하는 신부가 아닙니다”라고 대답했지만,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다.
미네소타주 출신의 상원의원 폴 데이비드 웰스턴과 하원의원 제임스 맥거번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것도 기억에 남는다. 그들은 우리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메모도 했다. 그런데 보좌관이 “여러분 얘기로는 한-미 소파가 이렇게 불평등하고 한국 국민들이 많은 피해를 당하고 있는데 한국 정부는 뭐하고 있습니까? 한국 정부가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라고 물었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자존심이 상하고 화도 났다.
당시 양성철 주미 한국대사는 우리가 한국을 떠날 무렵 한 언론사와 한 인터뷰에서 “환경·노동문제를 소파 협상에서 제외할 수도 있다”는 발언과 “노근리 양민학살은 확실한 증거가 없어 법적 접근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을 해서 물의를 빚었다. 주미 한국대사관을 찾아간 자리에서, 방미단의 대표 이김현숙(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공동대표)이 “양 대사의 발언이 한국에서 큰 물의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지금 소파 개정 협상을 앞두고 매우 민감한 시기인데 우리나라의 국익을 옹호해야 할 대사가 그런 발언을 하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자 그는 “그 발언은 언론에서 와전한 것”이라고 변명했다. 우리는 그렇게 중요한 현안 문제가 왜곡되었는데도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그를 보며 속상했다.
이어 9월27일 뉴욕으로 간 대표단은 두 곳의 라디오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불평등한 소파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또 국제행동센터(IAC)에서 대인지뢰 금지운동에 대한 설명을 듣고, 퀘이커 교도의 유엔본부 사무실도 방문했다. 불편한 다리로 절뚝거리며 지하철을 오르내리다 보니 몸이 몹시 힘들었다. 일행 모두가 힘들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몸보다 마음이 더 아팠다. 잘못을 저지른 당사국에 와서 비록 양심 있는 사람들을 만나긴 했지만, 무능한 정부를 대신해서 활동하고 있는 우리의 처지가 마치 근대 조선의 초라한 망명객들처럼 느껴졌다. 왠지 서럽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노가 솟구쳤다.
미국 일정을 마친 뒤 일부는 먼저 귀국하고 나와 변연식 국제민주연대 대표와 정기열 목사는 푸에르토리코의 비에케스 미해군 폭격장을 방문했다. 그곳은 정말로 매향리와 똑같았다. 1917년 미군은 푸에르토리코의 본섬을 점령해 미국령으로 만들고 75%를 기지로 만들었다. 2001년 6월14일 사격장이 폐쇄됐을 때 비에케스섬의 밀림은 다 사라져버리고 식수원은 오염돼 있었다. 그렇게 주민 3만명은 삶의 터전을 잃었다. 그 가운데 2만명은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 그래도 미국에는 도시마다 비에케스 센터가 있어서, 그 넓은 북미대륙을 버스를 타고 오가며 싸우고 있었다. 그런 싸움이 있었기에 비에케스 사격장이 매향리보다 먼저 폐쇄됐는지 모르겠다.
소파 개정 협상에서 한국 쪽에 유리하도록 압력을 넣으려던 우리 대표단의 미국 여행 주목적은 사실 이루지 못했다. 앞서 8월 협상 때 한-미 당국은 “2개월 안에 미국에서 협상을 재개하겠다”고 발표했지만 국민행동 대표단을 의식해서인지 후속 협상은 일정조차 잡히지 않았다. 일행 중에 그나마 영어를 하는 게 나뿐이라서 연설을 도맡아 하느라 힘도 들었다. 보름 남짓 만에 미국내 여론을 움직이는 것은 사실 불가능했다. 그래도 미국에서 우리의 주장을 이야기했다는 데 의의가 있었다. ‘정의와 평화를 위한 아시아태평양센터’의 앤드루 웰스당이 아니었다면 그마저 어려웠을 것이다. 다시 한번 국제연대의 어려움을 실감했던 미국 활동이었다.
구술정리/김중미 작가
문정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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