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현-길 위의 신부 71
2002년 6월13일 오전 10시,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의 한 지방도로에서 친구 생일잔치에 가던 여중생 효순이와 미선이가 50t 장갑차에 깔려 온몸의 뼈마디가 으깨지고 뇌수가 터져 참혹하게 죽고 말았다. 장갑차 운전자는 미2사단 44공병대 소속 마크 워커 병장이었다.
미2사단은 사건 발생 바로 다음날인 6월14일 유족들만 참여시킨 채 현장 브리핑을 했다. 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고 오로지 사건을 빨리 덮어버리려고만 했던 것이다. 미군에서는 훈련중이던 장갑차였다고 했다. 하지만 훈련을 시작하기 전 미리 통보해야 하는 원칙을 어겼고, 심지어 통보했다고 거짓말까지 하며 효순·미선이가 죽은 것은 두 학생 탓이라고 왜곡했다. 또 미군은 장례식을 먼저 치르면 미2사단장과 면담을 해주겠다고 약속하고는 정작 유족들이 장례식을 치르자 태도를 바꿔 면담을 거부했다. 그러고는 유족들에게 이 사건을 사회 여론화시키지 않는 조건으로 4억원을 주겠다고 매수를 시도했다.
6월28일 미2사단 공보실장인 브라이언 메이커 소령이 발표한 자체조사 결과는 기가 막혔다. “여중생 죽음에 어느 누구의 과실도 없고, 궤도차량은 사고 당시 모든 안전수칙을 이행했다. 한-미 합동조사 결과 누구도 힐책받아야 할 사람은 없고 어느 누구의 과실도 아닌 것으로 결론났다”.
7월3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서 여중생 사망사건 진상조사 중간발표를 통해 미2사단의 발표에 대해 조목조목 문제제기를 했다. 그러자 다음날 당시 주한 미사령관인 리언 러포트는 “미 육군이 이 비극적인 사고에 대한 전적인 책임이 있음을 인정한다. 사고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통감하며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모든 조처를 강구할 것이며, 그동안 여러 가지 조언과 협조를 아끼지 않은 한국군과 한국 경찰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7월8일에는 서울지검 의정부지청이 미군 장갑차 운전자 마크 워커 병장과 선임탑승자 페르난도 니노 병장을 상대로 사고 경위들을 조사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주한미군은 한-미 주둔군지위협정(소파)을 핑계로 한국 법무부의 사건 조사에 불성실하게 응하고, 두 병장은 소환을 거부했다. 니노 병장은 7월29일에야 출석해 조사를 받았다.
앞서 7월10일 한국 법무부는 소파에 따라 두 사람에 대한 ‘형사재판 관할권 포기 요청’을 보냈다. 그러나 7월27일 주한미군 사령부는 “자국 군인이 공식적 업무를 수행하는 동안 발생한 사건에 대해 군이 재판권을 보유하는 전통은 미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사고와 관련된 미군들은 깊이 뉘우치고 있다”는 등의 발언을 하면서 사실상 재판권 이양 의사가 없다는 것을 드러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주한미군의 철면피 같은 행동에 한국군도 동조를 한 것이었다. 한국 국방부는 7월16일과 20일, 미8군 사령관과 대책회의를 한 뒤, 22일 국방부 황의돈 대변인의 브리핑을 통해 “현재 우려할 만한 수준의 반미감정 때문에 미군이 사건 대응을 하기가 어려운 까닭에 국방부가 대신 나서기로 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미선·효순이 사건이 일어난 뒤 평화통일운동단체들은 ‘여중생 범대위’를 구성해 의정부에 있는 미2사단 앞에서 뜨거운 여름 내내 항의집회를 했다. 초기에 반짝하던 언론들은 시간이 지나자 곧 무관심해졌다. 그런데 방학을 한 뒤 미선·효순이와 같은 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이 미2사단 앞으로 촛불을 들고 나오기 시작했다. 또 그 사실이 인터넷을 통해 알려지자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막았다.
8월5일 의정부지청은 여중생 사망사고의 주된 원인이 운전병과 선임탑승자 사이의 통신장애였다고 발표했다. 의정부지청은 미군 쪽에서 재판권을 포기하면 두 사람을 업무상 과실치사죄로 기소하겠다고 조사 결과를 발표했지만 주한미군의 반대로 가해자를 재판장에 세우지도 못했다. 사건이 일어난 지 5개월 뒤인 11월20일과 22일, 주한미군 군사법정은 두 미군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구술정리/김중미 작가
구술정리/김중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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