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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삼보일배’ 이어 ‘부안 핵폐기장’…끝없는 싸움 / 문정현

등록 2010-09-14 18:54수정 2010-09-19 14:49

문정현-길 위의 신부 77
정부는 1986년부터 핵폐기물 처리장 터 선정작업을 벌여왔다. 영덕, 울진, 장흥, 안면도 등을 대상으로 놓고 검토하다 90년 안면도로 결정한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하지만 3년 넘게 계속된 주민들의 반발로 안면도 처리장 선정은 백지화되었다. 정부는 94년 12월 다시 인천 옹진군 굴업도를 후보지로 선정했다. 그동안 전혀 거론되지 않던 서해안의 작은 섬 굴업도를 돌연 지정한 데는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었다. 핵폐기물 처리장 후보지가 선정될 때마다 각 지역은 물론 전국적으로 반핵운동이 거세게 끓어올랐고, 이는 국회의원 선거에도 영향을 미치는 변수가 되었다. 그래서 9가구만 거주하는 작은 섬 굴업도를 후보지로 지정한 것이다. 그러나 굴업도 주민들마저 반대에 나섰고 인근 섬 주민과 인천시민들까지 가세했다. 그런 와중에 95년 5~9월 진행된 환경영향평가에서 굴업도에서 활성단층 징후가 발견되면서 정부는 결국 계획을 취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 5년간 수면 아래로 들어갔던 핵폐기장 문제가 부안에서 다시 불거졌다.

2003년 7월11일 아침 9시30분 김종규 부안군수가 핵폐기장 유치 기자회견을 열었다. 김 군수는 그 전까지 일관되게 핵폐기장 유치를 반대해왔을뿐더러 그런 기자회견을 한다는 사실도 미리 알리지 않았다. 당연히 군청 공무원, 경찰, 기자들도 몰랐다. 당시는 산업자원부에서 6월부터 3차에 걸쳐 핵폐기장 유치 문제를 두고 부안지역 여론조사를 했는데 반대 의사가 점점 높아지고 있던 와중이었다. 앞서 산업자원부와 한국수력원자력공사가 연 주민설명회 역시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그래서 부안 주민 대다수는 핵폐기장 후보지 선정을 위한 민주적 절차를 요구했다. 부안 위도가 핵폐기장 후보지로 확정될 때까지 주민 동의를 위한 토론이나 민주적 합의를 위한 절차적 과정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산업자원부는 중·저준위용과 고준위용 핵폐기장 후보지 조사를 겨우 한달 만에 끝낸 뒤 ‘우수’하다고 졸속 평가를 내렸다.

그런 만큼 부안군의회에서 핵폐기장 유치안이 부결될 것은 당연한 절차였다. 이를 미리 짐작한 김 군수는 11일 아침 일찍 일방적으로 유치 선언을 해버린 것이다.

핵폐기장 자체의 문제도 컸지만, 부안군민들이 분노한 가장 큰 이유는 참여정부가 자신들의 첫번째 국책사업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핵폐기장 유치 문제를 일방적이고 독단적으로 처리했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부안군민의 심경은 헤아리지도 않고 민주적 절차를 외면한 독선적인 군수에게 ‘국가를 위해 용단을 내려줘서 고맙다’며 국력을 다해서 돕겠다며 치하했다. 나나 문규현 신부는 대통령의 말에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바로 다음달 부안군 농민회를 중심으로 원불교 김인경 교무님, 내소사 진원 스님, 황진형 목사를 비롯한 지역 종교계와 시민단체가 모여 ‘핵폐기장 백지화·핵발전소 추방 범부안군민 대책위’ 발족식을 열었다. 그때부터 부안군민들과 시민단체가 하나되어 위도 핵폐기장 반대 싸움을 시작했다.


때마침 문규현 신부가 부안성당 주임신부로 있었다. 삼보일배가 거의 끝나갈 때쯤 핵폐기장 유치 문제가 터져서 규현 신부는 쉬지도 못하고 이 일에 뛰어들어야 했다. 무슨 놈의 일복인지 동생 신부를 지켜보기가 참으로 딱했다. 하느님께서 규현 신부를 부안성당으로 보내신 특별한 소명이 있을 거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위도에 핵폐기장이 들어선다면 농업과 어업이 주업인 부안의 생명은 끝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실제로 핵폐기장이 유치된다는 소식만으로도 계약재배 쌀이 취소되는 일이 여기저기서 벌어졌다. 부안성당은 핵폐기장 싸움의 중심이 되었다. 신자들은 투쟁하는 군민을 위해 하루 200명분의 밥을 날마다 해댔다. 참으로 대단했다. 군민 중에는 핵폐기장을 찬성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반대하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신자들도 대부분 규현 신부를 지지하며 헌신적으로 임했다.

나 역시 날마다 부안성당으로 갔다. 동생 신부가 부안에 있는 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서로 동반자이기도 했다. 규현 신부는 내가 부안에 오는 것을 걱정했지만, 나는 또 규현 신부와 부안군민들이 걱정스러워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구술정리/김중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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