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7월22일 ‘핵폐기장 건설 반대 및 군수 퇴진을 위한 부안군민 1만인 궐기대회’를 끝내고 군청으로 향하는 행렬과 경찰이 격렬한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문규현 신부(가운데)가 덤프트럭 위로 올라가려 하자 경찰이 소화기로 저지하고 있다.
문정현-길 위의 신부 78
2003년 7월부터 1년 넘게 지속된 부안군민의 핵폐기장 반대 싸움은 치열했다. 전국 각지에서 엄청난 수의 전경들이 부안에 투입되었다. 외부에서는 부안에 계엄령이라도 내려진 줄 알고 아예 들어오지도 않으려 했다. 그때 핵폐기장 유치를 찬성한 사람들은 돈을 챙겼지만 반대한 사람들은 투쟁 과정에서 많이들 다치고 감옥에 가고 정신적인 상처로 치료를 받아야 했다. 나는 애타는 마음으로 부안 상황을 날마다 동영상으로 찍고 편집해 <오마이뉴스>, 전북지역 인터넷뉴스 <참소리>로 보냈다.
그해 22일 오전 전북 부안군 수협 앞에서 8000여명의 군민이 참석한 가운데 ‘핵폐기장 건설 반대 및 군수 퇴진을 위한 부안군민 1만인 궐기대회’가 열렸다. 이날 대회에서 군민들은 “핵폐기장 계획이 백지화될 때까지 투쟁하겠다”고 결의하고, ‘모든 일손을 놓는다’, ‘모든 운송수단은 도로에 주차시킨다’, ‘핵폐기장 반대 깃발·스티커를 단다’, ‘매일 오전 10시 터미널 사거리로 모인다’는 행동강령을 채택했다.
대회를 마친 뒤 문규현 신부와 시민사회단체 대표들, 군민 대표들이 쇠사슬로 몸을 감고 앞장서서 군청을 향해 행진을 시작했다. 그러다 저지하는 경찰과 큰 싸움이 벌어졌다. 부안 읍내가 전투경찰 반, 군민 반이 되었다. 농사만 짓던 군민들이 어떻게 싸워야 할지 몰라 허둥대자 귀농한 젊은이들, 변산공동체 식구들이 앞장섰다. 전경들이 덤프트럭 위에서 방패를 휘젓고 화염방사기를 쏘아대는데도 군민들은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경찰의 폭력적인 제지에 맞서 군민들은 유명한 곰소항의 썩은 젓갈을 비닐에 담아 던졌다. 그 젓갈이 여기저기서 터지니 썩은 내가 진동했다. 다치는 사람이 속출해 나도 동영상만 찍고 있을 수 없어 앞으로 나가려 했지만 그때마다 동생 규현 신부가 나를 뒤로 끌어다 놓았다. 그러면서 정작 자기는 농민과 젊은이들 대열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덤프트럭에 올라가 그 장면들을 찍고 또 찍었다.
7월의 격렬한 반대 싸움 뒤, 부안군민들은 날마다 촛불을 들었다. 그 유명한 태풍 ‘매미’가 휩쓸고 지나가며 폭우를 쏟아붓던 날에도 그들의 촛불은 꺼지지 않았다. 저녁마다 지역의 재주꾼들이 모여 촛불집회를 격려했다. 또 그 안에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기 몫을 찾아 했다. 밥하는 사람, 무대를 만드는 사람, 사회를 보고 집회를 거드는 사람까지 부안 전체가 자발적 공동체로 새로 태어난 듯했다.
부안군민의 반대 여론이 높아지자 김두관 당시 행정자치부 장관은 8월 주민투표를 제안했고, 부안 핵반대 대책위는 11월 주민투표를 수용하기로 결의했다. 그런데 정부와 부안군수는 석달이 지나도록 주민투표를 하기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농사철이 다가오자 군민들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주민투표를 실시해 결론이 나야 생업에 복귀하고 모든 일상이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부안군민 스스로 주민투표를 하기로 결의하고 주민투표관리위원회를 만들었다.
2004년 2월14일 한국 주민운동 사상 큰 이정표를 남기며 부안 주민투표가 이뤄졌다. 투표는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정부에서 주관할 때와 마찬가지로 철저한 준비 과정을 거쳤다. 여성들은 집집마다 방문해 투표자 명부를 확인·작성할 정도로 지극정성이었고 간절했다. 아마도 군청이 보관해온 명부보다 정확하게 만들어졌을 것이다. 전국의 시민사회단체 사람들도 부안으로 달려와 주민투표를 지켜보고 공정한 선거관리와 감시에 힘을 쏟았다. 그 모든 과정은 인터넷신문을 통해 생중계되었다. 투표율은 70%가 넘었고 그중에서 90%가 반대를 했다. 결국 정부도 부안군민의 강한 의지에 정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부안 핵폐기장 유치반대 싸움에는 4대 종단의 연대와 협력이 참으로 큰 기여를 했다. 원불교의 김인경 교무는 ‘부안의 어머니’라 불리며 대책위 사람들을 챙기고, 촛불집회 때는 연설과 기도로 군민들을 품었다. 부안성당의 문규현 신부는 지도부와 군민의 단결을 유지시키며 싸움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했다. 부안제일교회 황진형 목사는 교회 안에서 어려움이 굉장히 컸지만 그래도 굽히지 않으며 대책위 공동대표로 일했고, 내소사 진원 스님 역시 크나큰 정신적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부안 싸움은 엄청난 공권력에 부서지는 약자들을 방어하기 위해 여러 종교인들이 차이를 넘어 함께 맞선 종교일치운동의 현장이기도 했다.
구술정리/김중미 작가
문정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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