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2월 평화유랑을 끝내고 평택 대추리에 정착한 필자를 비롯한 평화바람 일행이 미군기지 이전 반대 대책위 주민들과 함께 국방부의 지장물 조사단의 마을 진입을 막고 있다.
문정현-길 위의 신부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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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부터 1년 반 가까이 전국을 평화유랑하는 동안 사람들은 나를 보며 신기해했다. 나이 든 사람이 되지도 않는 노래를 부르고 속에 있는 말을 거침없이 뱉어 버리니까 평범하지 않은 기인으로 보는 것 같았다. 나는 그냥 우러나는 대로 슬픔과 분노를 표출하는 편이다. 또 사목생활이든 사회운동이든 열정적으로 몸을 던졌다. 그래서 유랑생활도 처음엔 멋쩍고 이상했지만 내 식대로 돌파해 버렸다.
유랑을 함께 한 평화바람은 공동 목적을 갖고 있었지만 살아온 삶과 생각이 저마다 달라서 서로 소통하고 맺힌 걸 푸는 게 쉽지 않았다. 무엇을 결정하든 평화바람 구성원 모두의 의견을 듣고 결정하려 했지만 의견 대립으로 서로 언짢은 적도 많았다. 유랑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들었다. 유랑은 끝이 보이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도 끝없이 사람들을 만나고 평화에 대해 나누면서 뭔가 이루어질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 목적을 다 이룰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지만 계속 유랑을 해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유랑을 떠난 이듬해인 2004년 3월28일, 지리산 실상사의 도법 스님도 순례의 길에 나섰다. 그 무렵 현장에 깊이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이 이제 뭔가 새로운 변화,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는 공통된 기운을 느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도법 스님과 함께하는 생명평화탁발순례단을 섬진강이 있는 경남 하동에서 만났다. 도법 스님과 걷는 탁발순례자들은, 이름난 시인들을 비롯해 환경운동 하는 사람들, 지역 운동가들과 귀농인, 생태운동가, 마음공부 하는 사람들까지 꽤 많았다. 조용하고 종교적이었다. 나는 늘 투쟁의 현장에서 현장 사람들을 만나왔던 터라 그런 사람들을 만나니 이방인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리의 유랑이나 도법 스님의 탁발순례나 출발은 같았지만 분위기가 달랐다. 나는 그저 우스꽝스러운 광대였다.
2004년 12월 첫주 우리는 평택 대추리에서 유랑을 마쳤다. 본정리에서 열린 촛불집회에 참여해 주민들에게 인사를 했는데 우리를 환영해주는 모습이 가슴에 맺혔다. 그런 느낌을 받은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다. 우리는 대추리로 들어가 살기로 했다. 평화바람 1기 때 같이했던 사람 가운데 몇명은 떠나고, 여름과 마후라, 두 친구가 합류했다. 우리는 대체로 실명 대신 별명을 지어 불렀다.
우리는 마을에 들어갈까 시내에 있을까 고민하다가 마을에서 주민들과 함께 지내기로 했다. 나와 오두희, 여름·반지·밥·마후라·해밀·팔공·두 시간, 모두 아홉명이 함께 살게 되었다. 대추리에는 1반부터 4반까지 있는데, 1반은 대추리에서 제일 남쪽 구석, 미군기지 울타리 옆이었다. 대추리에서 가장 어려운 사람들이 살던 동네인데다 천주교 신자들도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 미군이 살던 방 두 칸짜리 집을 세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옆에 살던 또다른 미군이 반미 활동가들이 들어오니까 불편해서인지 이사를 간 덕분에 그 집마저 세를 내었다. 그렇게 한 채에는 여자들이 살고 다른 한 채에는 남자들이 살았다.
대추리 사람들은 우리 9명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서로 형제도 아니고, 그렇다고 모두 천주교 신자도 아닌데 20대부터 70대 노인까지 남녀 구별 없이 같은 집에서 산다고 하니 신기하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한 듯이 바라보았다. 우리가 모처럼 밥을 해 먹으면 도대체 무슨 반찬을 먹나 해서 기웃거리고, 또 반찬이나 김치도 갖다 주었다.
대추리에 들어가서 처음 한 일은 본정리에 자리한, 팽성 대책위 바로 앞 비닐하우스에서 날마다 열리는 촛불집회에 참가한 것이다. 2월이니 농사를 짓지도 않고 한가하니까 마을 사람들도 거기 모여 있었고 우리도 밥만 먹으면 쫓아갔다.
그런데 우리가 들어가자마자 국방부에서 미군기지 확장을 위한 ‘지장물 조사’를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지장물조사는 ‘수용 대상 지역에 대한 토지 및 물건 조사’를 말하는 것으로 강제수용을 위해 가장 먼저 시작하는 행정절차였다. 2004년 12월 주한미군기지 이전 평택지원 특별법이 제정된 뒤, 2005년 2월21일부터 3월14일까지 평택 대추리와 도두리에 대한 지장물 조사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국방부는 이후 6월 사업 실시계획 승인 고시를 하고 이전 대상 터의 주민들과 협의매수를 하는 절차를 밟았다. 이때부터 대추리와 도두리 주민들은 보상금을 받고 하나둘 마을을 떠나기 시작했다. 남은 주민들은 조사를 위해 마을에 들어오는 토지공사와 주택공사 직원들을 막아내는 투쟁을 시작했다.
구술정리/김중미 작가
문정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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