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1월 평택 대추리·도두리 마을 주민들이 가을 평화운동회를 열었다. 미군기지 이전 압박 속에 쫓겨날 위기를 겪으면서도 주민들과 활동가들은 평화마을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문정현-길 위의 신부 88
2005년 여름 프랑스 라르자크 탐방에서 그들의 투쟁사를 보니 평택 대추리와 흡사한 면이 많았다. 라르자크 주민이 내세웠던 “라르자크의 땅은 우리가 지킨다. 이 땅은 우리의 생명, 끝까지 지킨다”는 구호는 “이 땅은 우리 목숨, 질긴 놈이 이긴다”는 대추리의 구호와 비슷했다. 라르자크의 투쟁은 비폭력이라는 원칙이 정해져 있었다. 이탈리아의 한 수도공동체가 단식을 하면서 주민들과 긴 토론 끝에 반군사기지운동의 원칙을 비폭력 평화운동으로 관철시킨 덕분이었다. 라르자크에서 파리까지 800㎞가 넘는 길을 트랙터를 타고 가서 에펠탑에다 양 60마리를 풀어놓는 시위를 한 것이 좋은 예였다.
라르자크를 거쳐 독일의 트리어란 곳에 갔더니 슈팡달렘이라는 공군기지가 있었다. 그곳에서는 미군기지로 직접 피해를 본 ‘군터’라는 농민이 외롭게 싸우고 있었다. 독일은 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이었기 때문에 나토의 군사기지를 반대할 수 없는 국민적 정서가 있었다. 그러나 독일 정부가 미군과 상의해서 주민 피해를 최소화한다는 원칙이 지켜지고 있었다. 우리가 유럽을 도는 동안에도 대추리에서는 계속 국방부와 부딪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여행을 다니면서도 몸과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탈리아의 아시시에 들렀을 때 일이다. 다리가 하도 아파 성글라라 대성당 앞에 앉아 있는데 여행객들이 나한테 동전을 놓고 가기 시작했다. 내 모습이 걸인이나 노숙자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여행 마지막날, 울적한 마음이 들어 로마의 한 광장에 들러 쉬면서 내 애창곡인 ‘김삿갓’ ‘흙에 살리라’ ‘주한미군 철수가’ 등을 일행들과 흥얼거렸다. 그러다 거리의 악사들이 광장에 있는 노천카페에서 아코디언·첼로·바이올린을 흥겹게 연주하며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내가 ‘산타루치아’를 큰소리로 2절까지 다 불러내자 노천카페에 있던 사람들이 ‘브라보’를 연발하며 박수를 쳐주었다. 초라한 동양 노인이 이탈리아어 노래를 완벽하게 부르니 모두 신기해하는 것 같았다. 여행 내내 대추리에서 들리는 어두운 소식에 의기소침했던 일행은 그렇게 울적한 마음을 털어냈다.
힘든 여행이었지만 김택균 사무국장이나 주민들은 군사기지 문제로 고통을 겪는 곳이 대추리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앞으로 싸우는 방법에 대해서도 새로운 자극을 받았다. 그래서 2006년 1월에는 ‘트랙터 전국평화순례’를 하게 되고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 대추리 평화촌도 이루어 나가게 되었다. 빈집을 청소해 변호사 상담실을 만들고, 찻집과 사진전시실, 게스트하우스도 만들었다.
그 결과, 지금도 대추리 평화센터를 만들어 대추리 투쟁의 유물들을 전시하고 외지인들에게 평화교육을 할 준비를 하고 있다.
대추리에는 1968년 마을 주민들이 쌀을 모아 손수 지은 대추초등학교가 있었다. 학교는 마을 주민들에게는 큰 자부심이고 자랑거리였다. 학생 수가 줄어 폐교된 뒤에는 ‘평택두레풍물보존회’가 들어와 전통문화 체험장으로 쓰였고 주민 행사장으로, 어린이 놀이터로 쓰였다. 그런데 국방부가 그 학교를 기지 이전 상황실과 전투경찰의 주차장으로 쓰려 했다. 주민들은 이를 막기 위해 대추초교에 주민도서관을 만들기로 했다.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솔부엉이 주민도서관이 개관했다. 또 10월에는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노순택이 ‘솔부엉이 하루 사진관’을 열기도 했다. 미디어 활동가들은 ‘들소리 방송국’을 꾸려 주민들의 상황을 영상으로 만들어 촛불집회 때마다 방영했다. 주민들이 아나운서가 되고 대본, 기사 작성까지 했다.
그뿐만 아니라 대추리에 모인 예술인들은 ‘들이 운다’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해 벽화와 벽시를 그리고, 비닐하우스 콘서트를 열었다. 또 대추초교에다 대추리 주민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또 평화유랑을 통해 만나게 된 어린이들도 와서 대추리에 벽화를 그리고, 평화운동가들도 찾아왔다. 이라크 파병 반대를 시작으로 평화군축 운동,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작은 평화, 피자매 연대처럼 크지는 않지만 소신있게 평화운동을 해온 사람들이나 개인이었다. 들소리라는 방송이 시작되면서 내가 영상을 올리는 일은 줄어들었다. 2006년부터는 이윤엽·최병수·유연복을 비롯한 예술인들이 더 많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중에는 원주민보다 지킴이들이 더 많아졌다. 그렇게 사람들이 북적거리자 평화마을이 이루어진 것 같았다.
구술정리/김중미 작가
문정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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