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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학교에 가고 싶어 가출…떠돌다 고아원으로 / 이이화

등록 2010-10-12 20:26수정 2010-10-14 16:52

필자의 부친 야산 이달 선생의 유일한 사진. <주역>의 대가로 이름난 부친은 필자를 비롯한 다섯 아들은 물론 집안 조카들까지 학교에 보내지 않고 한학을 가르쳤다.
필자의 부친 야산 이달 선생의 유일한 사진. <주역>의 대가로 이름난 부친은 필자를 비롯한 다섯 아들은 물론 집안 조카들까지 학교에 보내지 않고 한학을 가르쳤다.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1
한학자들 사이에 ‘야산 선생’으로 이름이 높았던 나의 아버지는 자식들은 물론 집안 조카들에게까지 철저하게 한문만 가르치고 학교에 보내주지 않았다. 나는 1936년(호적은 37년) 8월 대구에서 태어났는데, 일제 때는 학교에 가면 일본놈이 된다고 했고, 해방 뒤에는 학교에 가면 서양놈이 된다는 의식 때문이었다. 나이가 들어 또래의 친구들이 중학생이 된 모습을 볼 때면 부럽기 짝이 없었다. 사춘기에 접어들자 왜 한문만 배워야 하는지, 머릿속은 날로 어지러웠다. 나는 가출을 결심했다.

15살, 한국전쟁통인 1951년 초겨울 충남 부여군 은산면 옥가실에 살 때였다. 어머니에게 집을 나가 학교를 다니겠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마침 온전치 못한 의붓형을 고향 성주로 보내야 하는데 목돈을 혼자 들려 보낼 수 없으니 함께 가라고 이르고 나서, 작은외삼촌이 넉넉하게 잘사니 외가에 가서 학교에 갈 도움을 받으라고 일러주었다.

추위가 몸속을 파고드는 어느 날,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나는 읽던 책과 써놓은 글씨 등을 싸들고 나와 동네 앞 언덕에 서서 아버지가 계신 곳을 향해 하직 인사를 했다. “늘 강녕하게 사십시오. 불초자식은 떠나갑니다. 꼭 성공해서 돌아오겠습니다”라는 정도의 속말을 하면서 눈물을 흘렸던 것 같다.

무슨 까닭인지 형과 나는 김천에서 내렸다. 아마 김천에서 기차를 내린 뒤 버스로 성주로 가야 했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된다. 어머니가 일러준 대로 아버지 친구인 김병권 아저씨 집에 숙소를 잡았다. 순진하게도 돈을 넣은 가방을 시렁에 올려놓고 거리에 나섰다가 파출소 보초에게 불심검문을 받았다. 나는 풀려났으나 증명서도 제대로 없고 말도 횡설수설하는 형은 잡혀 구금되었다.

나는 어쩔 줄 몰라서 김병권 아저씨네로 돌아왔다. 시렁에 얹어놓은 가방에서 돈을 세어보니 내 또래의 그 집 아들이 3분의 1쯤 꺼내가고 없었다. 또 며칠 있으니 집안 아저씨뻘 되는 이가 와서, 아버지가 돈가방을 다시 가져오라고 보냈다고 하면서 가방째 들고 가버렸다. 생판 거짓말이었다. 돈을 모조리 잃어버렸으니 눈 뜨고 코 베인 꼴이었다.

나는 혼자서 외가로 달려갔다. 경북 성주군 용암면 죽전동 하무기에 살고 있던 작은외삼촌 두 분은 나를 무척 반겼고 동네 친척들에게 자랑스레 소개했다. 그래서 어른 대접을 받았다. 더욱이 서당 훈장은 평소에 나의 아버지 ‘야산 선생’을 알고 있어서 나를 유난스레 귀여워했다. 훈장과 때로는 시를 화답하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이렇게 나날을 지내면서 나는 아무래도 아버지에게 가출 동기를 밝혀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주자의 권학시 첫 구절인 ‘사내가 뜻을 세워 고향을 나와 배워 이루지 못하면 죽어서도 돌아가지 않으리’를 인용해 가출 동기를 밝혔다. 뒷날 들으니 이 편지를 받아본 아버지는 퍽 안심했다고 한다.

반년이 넘게 이렇게 보냈으나 인색한 외삼촌 내외는 나를 학교에 보낼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여름을 지내고 고령 성산면 낙동강변에 있는 새터의 이모집으로 갔다. 이모부(이름은 전병조)는 한시를 지을 줄 아는 선비였고 인품이 훌륭한 분이었다. 그래서 이분과 때때로 시를 화답했다.

아무튼 이모부는 사돈이 되는 대구 남일동의 부잣집을 소개해줬다. 대구 부호의 아들 김홍식 형은 내가 주역을 좔좔 왼다고 해서 나를 무척 아껴주었다. 그 집에 자주 드나들면서 이발소 같은 곳에서 지내며 학교 다닐 궁리를 했다. 하지만 이발소 종업원 자리도 구할 수 없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이화 역사학자
이이화 역사학자
이렇게 1년 가까운 세월을 보내는 동안 부산의 고아원에 들어가면 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무작정 부산으로 달려갔다. 철은 늦봄이었다. 피란 수도 부산은 그야말로 길 가다가 부딪칠 정도로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촌아이는 얼떨떨해서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영도다리를 건너 신선동에 있는 서울애린원을 찾아갔다. 하지만 바닷바람에 펄럭이는 고아원 천막을 바라보면서 용기가 나지 않아 오후 내내 고아원 언저리를 맴돌았다. 그러자 고아원 교사가 나를 불러들여서 고아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부모가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말이다. 이때부터 나는 필요할 적마다 임기응변처럼 거짓말로 잘 둘러대는 버릇이 생겨났다. 적어도 30대 이전까지 그런 버릇을 고칠 줄 몰랐다.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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