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대구 빈민촌 ‘팔삭둥이’ 어머니에겐 보물단지 / 이이화

등록 2010-10-14 09:07

일제강점기 때 대구 달성공원은 토성 마루의 관풍루와 신사 입구를 알리는 도리아가 있던 대구 시민들의 유원지였다. 1936년 필자가 태어난 비산동은 바로 달성공원 옆에 있는 빈민촌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대구 달성공원은 토성 마루의 관풍루와 신사 입구를 알리는 도리아가 있던 대구 시민들의 유원지였다. 1936년 필자가 태어난 비산동은 바로 달성공원 옆에 있는 빈민촌이었다.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2
1936년 8월 내가 태어난 곳은 대구 비산동이다. 어릴 적에 떠나와 기억엔 없지만, 당시 이 마을은 대구 외곽에 있는 빈민촌이었다. 마을 가운데는 늪지대로 웅덩이가 있었고 그 언저리에는 채소밭 따위가 널려 있었다. 빈민촌이어서 번듯한 기와집이나 일본사람들이 사는 양식 건물은 없었고 오두막과 비슷한 초가들이 몰려 있었다.

훗날 역사를 공부하면서 조사해 보니, 이곳에 사는 주민들은 도시의 일용노동자·지게꾼·식당종업원·행상들이었다. 직업이 다양했는데 바로 식민지 조선의 도시에서 빈민을 이루는 저소득층이었다. 더욱이 이 동네는 달성공원 옆에 자리잡고 있어서 대조를 이루었다. 달성공원은 널찍한 터에 온갖 놀이시설이 갖춰져 있어 일본사람이나 부자 아이들이 자주 놀러 오는 유원지였다. 그러니 비산동 주민들은 달성공원에 놀러 가더라도 차림새부터 달라 위축되기 마련이었다. 아버지는 몇가지 사업을 벌이면서 대구로 이사를 왔고 비산동에 허름한 초가를 세내 빈민촌의 주민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8개월 만에 태어났다. 일테면 팔삭둥이다. 태아 때부터 영양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게다가 미숙아로 세상 빛을 보았으니 정상적인 영아가 아니었다. 가슴과 팔다리는 배배 꼬여 있었다. 미리 말해 두지만 태생만이 비정상이 아니라 왼손잡이에다 키는 160㎝가 채 못 되며 학교도 정규과정을 거치지 않았고 생각도 삐딱하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태어날 때 나를 받았다는 둘째 형수는 그때 얘기만 나오면 ‘작고 삐삐 말랐어요’라고 했다. 동네 사람들이 아이를 보러 와서는 ‘그놈 눈 하나 똘망똘망하네’라고들 했단다. 흔히 하는 귀엽다든지 잘생겼다든지 같은 덕담 대신에 눈만은 총명하다고 말한 것이다. 어머니는 내가 어릴 때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팔삭둥이라고 말하지 말라’는 당부의 말을 잊지 않으셨다. 놀림감이 된다는 것이다.

내가 약골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어머니가 임신을 해서도 밥을 자주 굶었던 탓이다. 아버지는 생활비를 거의 주지 않았고 따라다니는 제자들이 가끔 몇 푼을 주었단다. 그래서 어머니는 비산동 언저리의 채소밭에서 잔일을 거들어 주고 시래기도 얻어왔고 무·배추로 나물죽을 끓여 먹으며 겨우 허기를 면했던 것이다.

더욱이 당시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킨 뒤 국민동원령을 내려 우리 민족을 압박했고 중일전쟁을 준비하면서 준전시체제로 돌입해 물자를 동원하는 바람에 생활물자가 더욱 귀했다. 이런 시절이었으니 젖이 넉넉지 않았지만 우유는 말할 것도 없고 쌀을 구해 미음을 먹일 수도 없었다.

아무튼 아버지는 다섯째인 내 이름을 주역 팔괘에 따라 글자를 고르고 돌림자를 붙여 짓느라 ‘이이화’(李離和)라 했다. 이름에 ‘떠날 리(이)’ 자를 붙인 사람은 지금까지도 찾아볼 수 없었고, 더욱이 남자 이름으로 ‘이화’는 찾아볼 수도 없으며, 같은 발음의 성과 이름자를 연달아 놓은 것도 아주 드문 편이다. 나는 이런 이름 때문에 어릴 적에는 놀림감이 되었고 커서는 ‘평화를 이간질시킨다’는 뜻이라고 비꼬아서 고개를 갸우뚱한 적도 많았다. 주역의 의미로는 ‘이’가 ‘빛날 리’ 또는 ‘불’을 상징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적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허약한 체질에 영양실조로 곧 죽을 것 같았던 나를 정성껏 키워서 살려냈다. 그의 평생 소원인 사내자식을 길러낸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느 진귀한 보배와도 맞바꾸지 않으려는 의지로 돌보았다. 여느 자식과도 다른 그럴 만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이이화 역사학자
이이화 역사학자
어머니는 예전 여인네들이 으레 그랬던 것처럼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가서 아들 셋을 낳고 잘 살았으나 20대에 사별해 홀로되었다. 그런데 아들들이 지능이 모자라고 부실해서 한숨을 안고 살았다. 그때 마침 성주에서 광산을 경영하던 아버지는 외가에서 독신으로 하숙을 하고 있었다.

외가 식구들은 ‘과부 딸’을 이 독신남과 재혼시키기로 합의를 했다. 우리 어머니는 늘, 첩이 된 신세를 마다하지 않고 똑똑한 아들 하나 낳으려고 재가를 했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어머니는 여느 여인네들이 겪지 못한 고생을 해야 했다. 아버지는 평생 동안 거의 생활비를 준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 반대로 어머니가 번 돈을 가져다가 다른 일에 쓰기만 했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건달’이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이이화 역사학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1.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2.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3.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4.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5.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