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여름 충남 부여읍 보리고개 옆에 있는 야산 이달 강역사적비 앞에서 선생의 제자들이 추모제를 올리고 있다. 1958년 8월 70살로 운명한 필자의 선친 야산 선생은 <주역>의 대가로 소문나 갖가지 기행과 일화를 남겼다.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3
나의 아버지 야산 이달(也山 李達)은 경상도 땅 김천 구성면의 원터에서 태어났다. 당신은 연안이씨 집안의 가난한 향반의 아들이었다. 옛 지명으로 지례 상좌원(오늘날 김천시 구성면 상원리와 하원리) 일대에는 임진왜란 직후부터 연안이씨들이 터전을 잡고 살아왔다. 대제학을 두 사람이나 배출했다 해서 명망이 높은 문중이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여느 향반과 같이 벼슬을 거의 하지 못하고 ‘명문 연안이씨 집안’이라는 위세를 가지고 토호처럼 행세했다. 경기도 일대에 널려 사는 월사공파(月沙公派·李廷龜)들이 조선 중기 이후 많은 벼슬을 누린 탓에, 일테면 광산김씨와 함께 2대 명문가로 꼽혔다. 그 후광을 입어 명문가로 행세한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만석꾼도 있고 천석꾼도 있어서 이들이 사는 마을에는 번듯한 기와집이 즐비했다. 문벌과 재력 두 가지, 향촌에서 위세를 부릴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지례현감이 부임할 때에는 이 마을 앞을 지나가게 되어 있는데, 관아에 들기 전에 이 마을 어른을 먼저 뵙고 가는 관례가 있었다. 만일 이를 어기거나 반감을 사게 되면 향촌 질서를 잡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쫓겨나기 일쑤였다. 이런 향반이기에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농민군을 피해 피난을 다녔으나 아주 못된 토호는 아니어서인지 큰 피해는 입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 농민군을 이끈 편씨들에 대한 반감은 매우 컸다.
아버지는 이들 이씨 문중에서 작은 종손으로 태어났다. 그 시절 종손은 문중에서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나의 할아버지는 찢어지게 가난했다. 게다가 선비 반열에도 들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집안이 가난하였으나 작은 종손이라는 혜택을 받아 동네에 차린 문중 서당에 다녔는데, 신동으로 일컬을 정도로 총명하여 문중의 촉망을 받았다. 그런데 10대에 들어 할아버지가 작고하였고 연달아 할머니도 돌아가셨다. 조실부모한 것이다.
그래서 작은할아버지가 두 집 살림을 꾸리게 되었다. 작은할아버지는 양반 체면이고 뭐고 가릴 것 없이 장사를 하기도 하면서 영리한 종손 조카를 공부시켰다. 10대까지 문중 서당에서 공부한 아버지는 20대에는 삼도봉을 비롯해 금강산·지리산 등 전국을 떠돌면서 공부를 했다. 예전 유랑지식인의 흉내를 냈다고 할까?
유랑에서 귀향한 당신은 이웃 동네에서 서당 훈장을 했으며 평생 <주역> 책을 놓지 않았다. 이름도 호적의 순영을 달(達)로 고쳤으며, 자호는 ‘다른 사람들을 좋은 곳으로 보내고 나서 막차를 탄다’는 뜻을 따서 야산(也山)이라 했다. 여기의 ‘산’은 주역 풀이로 동방, 곧 우리나라를 뜻한다.
주역을 읽다가 미쳤다는 소문 때문인지 아버지에게는 많은 일화가 따라붙었다. 산속에 살면서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줄 몰랐던 당신은 어느날 산에서 내려와서야 이 사실을 알고 김천경찰서 앞에서 미친 듯이 혼자 만세를 불렀다. 말할 나위도 없이 끌려갔지만 ‘주역 읽다가 미쳤다’는 소문 덕분에 풀려났다.
그 뒤 ‘요시찰 인물’로 찍혀서 가끔 기마경찰이 와서 동정을 살폈다. 기마경찰이 신작로에 보이면 당신은 방문을 열고 빗자루로 방을 쓸었다. 경찰이 다가와 갑자기 왜 방을 쓰느냐고 물으면 ‘왜놈 냄새가 진동해서…’라고 대꾸했다. 일제는 신작로를 닦을 때 호구마다 일정한 구역을 정해 할당했다. 당신에게도 한 구역이 정해졌지만 길은 닦지 않고 책을 펴놓고 읽었다. 감독관인 군수가 와서 왜 길은 닦지 않고 책만 읽느냐고 나무라자, ‘천명을 성품이라 이르고 성품 거느림을 도(길)라 이르며 길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 이른다. 이보다 더 큰 길을 누가 닦소?’라 답했다. 바로 <중용>의 첫 구절을 읽은 것이다. 군수는 허허 웃고는 구장을 불러 앞으로 이 선비에게는 부역을 시키지 말라고 당부했다. 어느 때인가 당신은 제자 몇명과 대전 역전을 지나고 있었다. 마침 낮 12시가 되어 오포가 울렸다. 길 가던 사람들은 모두 멈추어 서서 눈을 감고 일본 천황의 안녕과 국가의 무궁함을 비는 묵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 일행은 걷던 길을 그대로 걸어가고 있었다. 역전 파출소의 순사가 일행을 불러세워 힐난하자 당신은 대뜸 순사의 뺨을 후려치면서 ‘너는 황국신민으로서 묵도는 하지 않고 눈 뜨고 길 가는 사람들만 살펴보고 있었느냐?’고 호통을 쳤다. 그 순사는 그저 멍하니 일행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렇게 일제에 저항하는 행동을 했으나 직접 독립 투쟁에 나서지는 않았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얘기가 있다. 당신은 결코 양반 자랑을 하지 않았다. 내가 직접 본 얘기를 소개하면 이러하다. 어느날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은 손님들이 찾아와서 대화를 나누었다. 당신만이 박박 깎은 맨머리였다. 손님들이 양반 자랑을 늘어놓자 대뜸 ‘당신 할미가 종과 붙었는지 어떻게 알겠느냐’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그 손님들은 ‘야산 큰 학자인 줄 알았더니 저 모양이네’라고 말하고 휑하니 나가버렸다.
이이화 역사학자
그 뒤 ‘요시찰 인물’로 찍혀서 가끔 기마경찰이 와서 동정을 살폈다. 기마경찰이 신작로에 보이면 당신은 방문을 열고 빗자루로 방을 쓸었다. 경찰이 다가와 갑자기 왜 방을 쓰느냐고 물으면 ‘왜놈 냄새가 진동해서…’라고 대꾸했다. 일제는 신작로를 닦을 때 호구마다 일정한 구역을 정해 할당했다. 당신에게도 한 구역이 정해졌지만 길은 닦지 않고 책을 펴놓고 읽었다. 감독관인 군수가 와서 왜 길은 닦지 않고 책만 읽느냐고 나무라자, ‘천명을 성품이라 이르고 성품 거느림을 도(길)라 이르며 길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 이른다. 이보다 더 큰 길을 누가 닦소?’라 답했다. 바로 <중용>의 첫 구절을 읽은 것이다. 군수는 허허 웃고는 구장을 불러 앞으로 이 선비에게는 부역을 시키지 말라고 당부했다. 어느 때인가 당신은 제자 몇명과 대전 역전을 지나고 있었다. 마침 낮 12시가 되어 오포가 울렸다. 길 가던 사람들은 모두 멈추어 서서 눈을 감고 일본 천황의 안녕과 국가의 무궁함을 비는 묵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 일행은 걷던 길을 그대로 걸어가고 있었다. 역전 파출소의 순사가 일행을 불러세워 힐난하자 당신은 대뜸 순사의 뺨을 후려치면서 ‘너는 황국신민으로서 묵도는 하지 않고 눈 뜨고 길 가는 사람들만 살펴보고 있었느냐?’고 호통을 쳤다. 그 순사는 그저 멍하니 일행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렇게 일제에 저항하는 행동을 했으나 직접 독립 투쟁에 나서지는 않았다.
이이화 역사학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