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1947년께 필자의 선친 야산 이달(왼쪽 둘째) 선생이 전북 이리 송학동 후배 이상춘(신랑 신부 사이 가운데)씨의 집에서 이씨의 외동딸과 주역 제자인 정동한씨의 주례를 선 뒤 찍은 기념사진. 야산과 이씨는 형평운동을 같이 하며 독립자금을 모아 전달한 선후배 사이였다.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4
아버지(야산 이달)는 40대에 들어 하던 공부를 접고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 동기에 대해 내가 직접 물어본 적은 없지만 전해듣기로는 ‘돈을 벌어 세상을 구제하려는 결심’ 때문이라 한다. 그 뒤 광산의 광주가 되기도 했는데 이때 내 어머니를 만났던 것이다.
40대 후반에 당신은 대구로 나와 기미(期米·미두)를 해서 재미를 많이 보았다. 기미는 쌀값 시세를 미리 맞히어 이익을 보는 것으로 오늘날의 증권 선물거래와 비슷하다. 이때부터 호인 야산 선생으로 통했다. 야산은 주역을 통달해 기미를 잘한다는 소문이 나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이 훗날 제자가 되었다. 어느 날 친구와 기미장을 나와 거리를 걷던 당신은 거지를 볼 때마다 10원씩, 100원쯤을 나누어 주기도 했단다. 쌀 한 가마니 값이 20원 정도 하던 시절이었다.
당신은 기미로 번 돈을 두 군데에 쓴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진주에서 일어난 형평운동의 자금으로 보냈고, 어떤 인연인지 모르지만 이상춘이란 후배를 시켜 만주로 독립운동자금을 보냈다. 형평운동은 백정들의 평등 또는 권익운동이었는데 국내에서 탄압을 받자 본부를 만주로 옮겨 활동했다. 당시 형평운동의 지도자인 장지필 등과 어떤 친분이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또 하나는 기미에서 번 돈 29만원을 들고 철원으로 당신의 동생 등 30여호를 데리고 가서 집단농장을 만들어 공동노동·공동분배 방식으로 경영한 것이다. 하지만 농장은 3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 사람들이 생산된 물자를 훔쳐가기도 하고 게으름을 피우며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신은 42년 무렵 무슨 까닭인지 전북 이리읍(익산시) 고현정(묵동)이란 곳으로 이사를 했다. 우리 식구와 홀로된 작은아버지네 등 열댓명이 오두막집의 방 두 칸에 살았다. 큰형수 말로는, 어느 날 시아버지가 이사를 가자고 해서 좋은 집에 한재산 장만해 놓은 줄 알고 따라왔더니 오두막집 사립문 앞에 도착해 ‘이 집이 네가 살 집이다’ 하시더란다. 그 말을 듣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고 한다.
아버지는 고향을 떠난 뒤 평생 당신의 이름으로 재산을 소유하지 않았으며 주역의 후천개벽 사상으로 세상을 바꾸려 한 ‘도인의 신비성’이 있었다. 일제 때는 세금을 자신의 명의로 한 푼 낸 적이 없으며 비누·치약 따위 현대문명의 이기를 철저히 거부하면서 일생을 살았다. 독자들은 앞으로도 이런 아버지 얘기를 자주 듣게 될 것이다.
아무튼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집의 생활은 고단하기 짝이 없었다. 식구들이 누울 공간이 좁아 앉아서 밤을 새워야 했고 형님들이 생업으로 ‘리아카’(손수레)에 과일을 싣고 이리역 앞에서 팔았지만 끼니를 제대로 이을 수가 없었다. 일제 관청에서 배급하는, 기름을 짜고 남은 깻묵과 퍼석퍼석한 안남미 따위로 연명했다.
급기야 어머니는 견딜 수가 없어서 나와 내 동생을 데리고 방을 얻어 딴살림을 차렸다. 어머니는 무슨 물건을 이고 다니면서 도붓장사(행상)를 했다. 그 시절 한국 어머니들이 다 그렇듯, 어머니는 원체 부지런했던 덕분에 두 자식을 겨우겨우 먹여살렸다.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허약했던 나는 병치레가 유난히 많았고 늘 종기와 학질에 시달렸으며 자주 미자발(미주알)이 빠졌다. 요샛말로는 탈장이라고들 한다. 이웃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볼 때면 ‘낯빛이 노리장한(노란) 게 영 사람 노릇 못할 것’이라고 걱정을 했다.
게다가 나는 왼손잡이였는지 밥을 먹을 때나 글씨를 쓸 때 왼손을 써서 늘 혼이 났다. 어른들이 오른손을 쓰라고 소리를 질러대서 끊임없이 연습을 해야 했다. 아버지는 집 안에 있을 때보다 늘 출타를 해서 어디를 다녀오는 시간이 더 많았다. 찾아오는 손님들도 많았는데 어린 눈에도 뭔가 일을 꾸미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이이화 역사학자
이이화 역사학자
게다가 나는 왼손잡이였는지 밥을 먹을 때나 글씨를 쓸 때 왼손을 써서 늘 혼이 났다. 어른들이 오른손을 쓰라고 소리를 질러대서 끊임없이 연습을 해야 했다. 아버지는 집 안에 있을 때보다 늘 출타를 해서 어디를 다녀오는 시간이 더 많았다. 찾아오는 손님들도 많았는데 어린 눈에도 뭔가 일을 꾸미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이이화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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