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좌우익·친일파 섞여 주역 읊던 수락리 서당 석천암 / 이이화

등록 2010-10-20 10:00

1945년 10월 충남 논산 수락리로 이사한 뒤 필자의 부친 야산 선생이 정착해 제자들을 가르치던 석천암을 마천대 위에서 내려다본 전경. 필자가 3년간 글을 배우기도 했던 석천암은 한국전쟁 때  인민군 유격대 토벌과정에서 불태워졌으나 70년대 다시 재건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1945년 10월 충남 논산 수락리로 이사한 뒤 필자의 부친 야산 선생이 정착해 제자들을 가르치던 석천암을 마천대 위에서 내려다본 전경. 필자가 3년간 글을 배우기도 했던 석천암은 한국전쟁 때 인민군 유격대 토벌과정에서 불태워졌으나 70년대 다시 재건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6
우리 식구가 전북 이리 고현정(익산 묵동)에서 해방을 맞던 즈음 아버지는 자주 출타를 했다가 가끔 집에 들렀다. 해방된 뒤 어느날 아버지는 큰댁 식구들에게 이사를 가라고 일렀다. 그래서 어머니는 큰댁의 집과 논을 싼값에 인수해 동생과 성주에서 데려온 의붓형과 함께 고현정에서 그대로 살기로 했다. 하지만 나는 큰댁을 따라 충남 논산군 벌곡면 수락리로 들어갔다. 1945년 10월 무렵이었다.

수락리는 30여호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그야말로 첩첩산중의 외진 마을이었다. 아버지는 제자인 강화 선생의 식구들도 대구에서 이곳으로 옮겨 오게 했다. 두 집 살림을 합해 집 세 채를 마련하고 한 채에는 서당을 차렸다. 강화 선생의 부친이 한문에 밝아 우리 어린애들을 가르쳤다.

강화 선생의 동생 되는 분이, 온 식구가 만든 가짜 궐련을 논산과 대전 등지에 팔아서 생활비를 마련했다. 그마저 할 수 없게 되자 우리 식구들은 돌밭을 일구어 감자를 심었다. 쌀은 말할 것도 없고 보리도 없어서 이 하지감자를 몇 달이고 밥 대신 먹었다. 빨간 하지감자의 독이 너무 아려서, 나중에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감자만 보면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된장찌개에 들어 있는 감자를 거의 먹지 않는다.

아버지는 수락리에서 4㎞쯤 떨어진 마천대 아래 중턱에 있는 빈 절인 석천암에 거처를 정했다. 석천암은 절벽 아래 작은 분지에 산신당 한 채와 살림집 한 채가 덩그러니 자리잡고 있었고 절벽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나무로 만든 홈으로 연결해 물을 받아 썼다. 지금도 그 아름다운 정경이 가끔 꿈에 나타난다.

아버지는 제자들을 불러들여 주역을 비롯해 글을 가르쳤다. 나도 어느 때부턴가 마을 서당에서 석천암으로 옮겨 글을 배웠다. 그곳에서 글을 배우는 사람들은 나이로는 20대에서 50대, 성분으로는 순 한문쟁이를 비롯해 친일파, 좌우익 청년단체 인사, 미군정의 경찰, 지역으로는 경상도를 중심으로 서울·충청도·전라도 등 다양한 인사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현정암이란 분처럼 여운형과 건국준비위원회의 일을 하다가 도망쳐 온 사람, 서울에서 공산당 활동을 하다가 몸을 피해 온 사람, 대구10·1사건이 일어나자 세상을 피해 들어온 경찰관도 있었다. 상주 인원은 20여명이었으나, 끊임없이 들고 나는 이들이 더 많았다. 이들은 좁은 방 두 칸에서 번갈아 밤새 주역을 읽기도 하고 누울 적에는 양쪽 방향으로 머리를 눕히고 발은 사이사이 끼운 채 잤다.

밥은 어떻게 해결했을까? 가까운 동네에서 온 사람들은 쌀을 지고 와서 뒤주에 부었다. 먼 곳에서 온 사람들은 빈손으로 왔다. 이 양식으로는 멀건 죽을 아침저녁으로 끓여 먹어도 모자랄 수밖에 없었다.

이달원이란 분은 평양 출신으로 마라톤 선수였는데 올림픽 국가대표로 선발되려고 서울로 왔다가 북한 출신이어서 탈락했다. 그는 살길을 찾아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도인이 대둔산에 산다는 소문을 듣고 이곳으로 들어왔다. 그는 신실한 분이었는데 밥쌀을 내지 못해서 그 대신 밥 짓는 일을 도맡아 했다. 인정도 많아서 가끔 누룽지를 내게 주었다. 또 쌀이 떨어지면 가끔 자루를 들고 선생님이 써준 편지를 들고 산을 내려가 쌀을 구해 왔다. 장마가 지면 냇물이 불어나 교통이 두절되었다. 이럴 적에는 그야말로 초근목피로 때우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나는 아버지 옆에 잠자리를 내줘 남들보다는 편안하게 잔 편이었다. 남들이 글을 배우고 나면 마지막으로 내가 글을 배우는데 전날 배운 내용을 모두 외워야 했다. 나는 하루 종일 산속에서 노느라 글을 외울 겨를이 없었다. 남들이 먼저 배우는 시간에 부리나케 번갯불에 콩 구워 먹기로 외우기 시작했다. 떠듬떠듬 외우기라도 하면 다행이지만 중간에 막히면 ‘대꼬바리(담뱃대를 이렇게 불렀다)가 사정없이 날아왔다. 어느 때에는 이마에 대가 날아와서 피가 철철 흘렀지만 이를 닦아서도 안 되었다. 그저 맞으면서도 계속 외워야 했다.


이이화 역사학자
이이화 역사학자
낮에는 호랑이와 멧돼지가 출몰한다는 산속을 헤맸다. 봄에는 개금과 산딸기, 여름에는 복숭아·더덕, 가을에는 머루·다래를 따먹으면서 영양을 보충했다. 산속에는 이런 먹을거리들이 널려 있었다. 더덕은 몇십년 자라서 굵기가 ‘아이스케키’만했다. 윗부분을 칼로 자르면 뿌연 진액이 나오는데 이를 빨아먹고 뿌리는 풀섶에 획 집어던졌다. 그러고 나면 취해서 풀밭에서 잠이 들곤 했다.

어느날에도 그렇게 잠을 깨어보니 날이 어둑어둑했다. 부리나케 석천암으로 올라오니 아버지가 문 앞에 서 있다가 나를 보고는 아무 말 없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까지 아버지가 나를 미워한다고 여겼던 나는 그때 아버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 깊은 애정을 확인했다고 할까.

이이화 역사학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1.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2.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3.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4.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5.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