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선친 야산 선생이 1951년 안면도에서 부여군 옥가실로 옮겨와 삼일학원을 열고 단황(단군)을 받드는 삼일단을 조성하면서 친필로 새겨놓은 표석. 땅에 묻혀 있던 것을 올해 초 마을 주민이 발굴해 동방문화진흥회에 전달한 것이다.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10
충남 태안 안면도 개락금에 살 때 큰어머니도 아버지처럼 1년에 한번꼴로 나를 이리(익산)의 어머니에게 보내주었다. 한달쯤 어머니가 해주는 따뜻한 밥과 종종 닭고기도 얻어먹으면 살이 통통하게 오른곤 했다. 때로는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화투도 치고 자치기도 했고 때로는 소학교 학생들이 배우는 한자가 섞인 <학생연감>(일본판)도 읽었다. 그저 막연하게나마 나와 다른 세상에 사는 그 아이들이 부러웠다. 또 사진을 곁들인 <독립운동지혈사> 같은 책도 보았다. 이 책을 통해 윤봉길·이봉창·편강렬 같은 열사의 사진과 행적을 처음 배웠다. 독립운동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이다.
1950년 겨울 전쟁통에 이리에 들렀을 때는, 조금 거창하게 말하면 내 인생의 결정적 전환기를 맞게 됐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리와 마을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이리 시가에는 성한 건물이 없었으며 이리 역전은 피란민으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마을에는 학도병·보국대·방위군 등으로 끌려가버리는 바람에 청장년 남성들이 거의 없었다. 아이들은 잠깐의 ‘인공’(북한 인민공화국) 치하에 김일성 노래를 배워서 나에게 일러주기도 했다. 조금 모자라는 손위 의붓형도 방위군에 끌려가 집에 없던 시절이었다.
이제 나는 한문을 어느 정도 터득해 신문 잡지 정도는 거의 읽어냈다. 닥치는 대로 읽었으니 이때부터 난독의 습관이 붙었다고 볼 수 있겠다. 역전 식당에 가면 늘 신문이 놓여 있었다. 주인에게 사정을 해서 묵은 신문을 거두어 와서 읽었다.
그때 이리 어머니 집에는 남로당 간부이자 성주 당위원장을 지낸 외삼촌이 도망쳐 와서 숨어 지냈다. 외삼촌은 본명 박동섭을 누나의 이름인 박순금과 비슷하게 박순익으로 바꾸고 고무신 수선 따위로 직업을 삼았는데 계속 지하활동을 하고 다녔던 것 같다. 외삼촌은 틈만 나면 내게 많은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 얘기 속에는 불행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을 배려해줘야 한다는 가르침도 들어 있었다.
나는 내 또래들이 가지고 있는 만년필이 정말 부러웠다. 그래서 어머니를 졸라 돈을 약간 얻어 엿을 사서는 이리 역전에 엿판을 벌여놓고 팔았다. 역은 늘 사람들로 들끓어 엿이 아주 잘 팔렸다. 파카 만년필을 사는 목표는 아주 쉽게 이룰 수 있었지만 처음과는 달리 마음이 다른 데로 쏠렸다. 역전으로 오가다가 책방을 기웃거리면서 소설에 눈길이 쏠렸다. 하지만 책을 사서 읽을 처지는 아니었다.
그때 송학동에 살던 이상춘 선생의 따님 종희 누나는 나보다 대여섯살 위였는데 시집·소설 등 책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해방 직후에도 더러 빌려 보았다. 그전에 <춘향전>을 화장실에서 몰래 읽다가 아버지에게 들켜 호된 꾸지람을 들은 적도 있었으나 그 욕구를 누가 막을 수 있으랴. 이때에도 그 누나의 소설들을 빌려서 탐독하기 시작했다. 이광수·염상섭·박계주·방인근·김내성의 소설들을 읽었다. 특히 <흙>과 <상록수>에 심취해 나도 농촌계몽가나 사회봉사자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 때로는 누나가 새로 산 책을 빼앗아 먼저 읽기도 했다.
나는 <순애보> <마도의 향불> 등 소설들을 밤새워 읽으면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키웠다. 사랑이니 섹스니 하는 단어들을 익힐 수 있었다. 한문책을 읽을 때와는 너무나 다른 감동의 세계를 헤매고 있었던 셈이다. 이때의 감동은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이때 나의 결심은 더욱 굳어졌다. 고루한 아버지로부터 벗어나자. 나도 꿈을 이룰 수 있도록 학교를 다니자. 새로운 세상에 나가보자. 바로 이것이었다. ‘도통’을 했다고 소문난 야산 선생, 내 아버지도 아들의 이런 결심은 몰랐을 것이다.
51년 초 내가 이리에서 돌아왔을 때 큰댁은 개락금에서 부여 은산면 옥가실로 또다시 옮겨와 있었다. 아버지는 이곳 유지인 유치돈씨의 도움을 받아 건물을 지어 삼일학원이란 간판을 내걸고 다시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때는 석천암 시절과는 달리 온건한 주역패들이 중심을 이루었다.
하루는 아버지 몰래 혼자서 부여 나들이를 했다. 어떤 여학생이 하얀 교복과 운동화를 신고 길을 가고 있었다. 핫바지를 입고 있던 내 차림과 비교해보니 그 여학생은 천사처럼 보였다. 저 여학생과 어울리려면 나도 학생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더 들었다.
나의 가출 동기는 하나 더 있었다. 아버지와 큰어머니는 나를 전혀 서자로 여기지 않고 아들 중의 하나로 여겼다. 그렇지만 내 어머니에게는 달랐다. 형님들은 작은어머니라 부르지 않고 ‘서모’라 불렀다. 나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굳이 그런 호칭을 써야 하는지 불만스러웠다.
또 언제부턴가 내가 거리에 나가거나 남의 집에 가면 ‘쟤가 머리는 아주 좋은데 서자래’라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자주 들려왔다. 나이가 들면서 예전에 가정이나 사회에서 서자 차별 제도가 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사춘기에 접어들자 이런 내 태생에 대한 불만이 가슴속에 저며들었다. 나는 그렇게 끝내 가출을 결행했다.
이이화 역사학자
이이화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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