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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고된 부산 고아원 생활…한 권뿐인 책 통째 외우고 / 이이화

등록 2010-10-27 10:15

한국전쟁 중에 정부가 발행한 1953년도 중학교 국가고시 준비용 참고서 <지능고사>의 표지. 학교에 다니고 싶어 가출한 필자는 당시 피란 수도 부산의 고아원에서 이 책을 몰래 읽으며 입학의 꿈을 키웠다.
한국전쟁 중에 정부가 발행한 1953년도 중학교 국가고시 준비용 참고서 <지능고사>의 표지. 학교에 다니고 싶어 가출한 필자는 당시 피란 수도 부산의 고아원에서 이 책을 몰래 읽으며 입학의 꿈을 키웠다.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11
이 글의 앞머리에서 잠깐 얘기했듯이, 1951년 초겨울 전쟁통에 가출한 나는 1년 남짓 떠돌다 피란 수도 부산의 신선동에 있던 서울애린원이란 고아원에 들어왔다. 고아원 생활 첫날, 배가 고픈 김에 깡통 소고기를 듬뿍 넣은 수제비를 실컷 먹었다. 그런데 큰 사달이 나고 말았다. 심한 주림 속에 기름진 고기를 갑자기 한꺼번에 먹는 바람에 설사를 해대면서 앓아누운 것이다. 그러자 고아원에서는 나를 천막 한쪽 구석에 밀쳐놓고 약도 주지 않았다. 며칠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겨우 깨어났다.

정신이 들자 웬일인지 콩나물국과 사과가 먹고 싶었다. 반장인 박아무개에게 사과 한 개만 사달라고 부탁해서 그걸 얻어먹고는 겨우 살아났다. 그때 그 사과 맛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박아무개에게 그 은혜를 갚을 길이 없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고아원의 아이들은 그야말로 잡동사니였다. 서울에서 피란 온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양아치·소매치기·깡패 따위 별별 종류의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그래도 미군 하우스보이로 있던 아이들이 가장 ‘출신 성분’이 좋았다. 나는 ‘대촌놈’이어서 걸핏하면 이 아이들에게 얻어맞았다. ‘왕따’가 된 것이다. 나이에 비해 키도 몸집도 작은데다 세상 물정도 모르니 딱 놀림감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나를 유난스레 대우해준 학생들이 있었다. 그때 여느 고아들은 천막에서 지냈으나 학생들은 별도로 토막을 지어 거처하게 했다. 여기에는 경기·용산·경복·대광 등 서울에서 고등학교에 다녔던 학생 대여섯이 있었다. 그 가운데 경기고 학생인 김윤직이 아이들에게 초등학교 과정을 틈틈이 가르쳐 주었다. 나는 김윤직 형에게 인정을 받았다. 또 경복고에 다니는 박기정 형은 미술학도였는데 자주 <새벗> 같은 잡지에 나오는 동시에 그림을 그려 보여주었다. 그래서 틈틈이 그 방으로 가서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피란시절 고아원 생활은 지옥이라 할 수는 없지만 고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가끔 구호물품이 들어오면 산 밑 길가에서 비탈진 길을 타고 산 중턱에 자리잡은 고아원까지 옮겼는데 건장한 학생들은 모두 학교에 가고 없어서 나 같은 조무래기들만 짐을 날랐다. 특히 건물을 지으라고 목재가 들어오는 날이면 죽을 맛이었다. 또 목재를 쌓아놓은 뒤에는 이를 지키는 불침번을 서야 했다. 겨울철 천막은 말할 나위도 없이 추웠다. 천막 안에 난로를 피웠지만 강하게 몰아치는 바닷바람을 막을 수는 없었다. 먹을거리와 옷은 구호물자가 많이 들어와 넉넉했지만 채소를 먹지 못해 심한 영양 불균형에 시달려야 했다. 그나마 비록 내 몸에 맞지는 않았지만 옷은 넉넉하게 공급되었고 비스킷이나 초콜릿이 든 깡통도 필요한 만큼 공급되었다.

책이라고는 학교에 들어갈 아이들 몫으로 <지능고사> 한 권만 달랑 놓여 있었다. 나는 이 책을 혼자 차지했다. 틈틈이 읽고 읽어 나중엔 달달 외웠다. 수학이나 과학 공식까지도 뜻도 모른 채 모조리 외웠다. 이렇게 하나씩 염원이 달성되어 가고 있었다.

그런 어느날 아버지 제자인 강화 선생이 고아원에 찾아왔다. 정말 놀라 자빠질 뻔했다. 또다른 아버지 제자의 아들이 고아원에 잠시 있었는데 이 아이가 나를 알아보고 집에 돌아가 일러바쳤고 이 소문을 들은 아버지가 강화 선생을 보냈던 것이다. 강화 선생은 나에게 아버지 친구가 대신동에서 한약방을 하니 고아원을 나와 그곳에서 심부름하면서 학교를 다니라고 당부했다. 나는 완강하게 거절했다.

이이화 역사학자
이이화 역사학자
어느날 나는 목재를 지키는 불침번을 서고 있었다. 사실 불침번은 내가 도맡아 했다. 불을 켜놓고 책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등짝에 날벼락이 날아왔다. 원장 아들이 변소에 가다가 내가 <지능고사>를 읽고 있는 모습을 보고 발로 걷어찬 것이다. 그러고는 ‘불침번 보라고 했지 책 보라고 했냐?’고 소리를 질렀다. 이 아이는 내 또래로 경기중학교에 돈을 주고 들어간, 소문난 ‘불량소년’이었다.


이 아이는 학교에 다녀오면 천막 안으로 들어와 의자에 앉아서 아이들을 하나씩 불러다가 한 손으로 잡고 바닥에 쓰러뜨리는 장난을 쳤다. 자신이 보기에 멋지게 넘어지지 않았다고 판단되면 몇 번이고 이 짓을 되풀이했다. 내가 이 장난에 자주 걸려들었다. 나는 일부러 멋지게 넘어져 주었다. 그랬더니 만족해서 다시 되풀이하지 않았다. 물론 마음속으로는 ‘저놈을 언젠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고 별렀다.

이이화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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