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우여곡절 끝에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건너뛰어 광주고등학교에 입학한 필자가 광주의 번화가인 충장로를 걷고 있다. 멋으로 곧잘 책을 끼고 다녔는데 주로 사회과학 서적이나 역사책을 읽던 시절이었다.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15
1954년 목포에서 하릴없이 지내던 나는 이번에는 목포보다는 큰 도시인 광주로 올라왔다. 다행히 여름철이었다. 저녁 무렵 잘 곳도 없으니 막막할 수밖에 없었다. 광주 서동 근방의 길가 평상에 앉아 있자니 ‘성경’이라는 모표를 단 학생이 지나갔다. 옳다구나, 예수를 믿는 학생이니 동정심도 있겠지 생각하고는 형씨 하고 불러 세웠다. 그는 내 사정을 듣고는 아니나 다를까 자기의 자취방으로 데리고 갔다. 나는 서동의 언덕바지에 있는 그들의 자취방에서 며칠을 묵었다. 그곳에는 숭일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도 함께 살고 있었다. 좋은 친구들이었는데 지금은 이름조차 잊어서 그리울 뿐이다.
그 아래에는 빈집이 한 채 있었는데 이성웅이란 서중생이 가끔 집을 지켰다. 그는 나를 불러내더니 촌놈이 왔다고 으르다가 내 처지를 알고는 그 빈집에 살게 해주었다. 겨울에는 그가 준 일제 때의 학생용 코트를 이불 삼아 덮고 잤다. 나는 날마다 저녁시간을 틈타서 다방을 돌아다니면서 가오루와 은단을 팔아 먹을거리를 해결했다.
그래 봐야 하루 세끼 서동 입구에서 파는 고구마를 겨우 먹을 수 있을 뿐이었다. 고구마 꼬치에는 다섯 개가 꽂혔는데 아침에 한 개, 점심에 두 개, 저녁에 두 개씩 먹으면서 버텼다. 번 돈은 ‘백구’ 담배 껍질에 싸서 땅에 묻어 두었다가 일주일쯤 지나서 꺼내 햇볕에 말리곤 했다.
어느날 여관을 돌면서 물건을 파는 강만호를 만났다. 그는 내 은단 상자를 보더니 측은했던지 산수동에 있는 자기 집으로 데려가서 밥을 푸짐하게 먹여주었다. 그는 또 여관으로 물건을 팔러 다니는 이강철·이재호 등 주변에 사는 친구들을 불러들였다. 이들은 나를 시험해 보더니 자기들이 다니는 티지(TG)학원에 다니라고 권유했다.
이 학원은 광주역 앞에 있었는데 책상도 없이 나무의자만 일렬로 늘어놓고 강의를 했다. 좁은 교실에 40여명의 학생이 바글거렸다. 중학교 과정을 속성으로 가르쳤다. 또 이강철은 쌀값 정도만 내고 자기 집으로 와서 살라고 제의했다. 그래서 좁은 방에서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 등 네 명이 같이 지내게 됐다. 밥도 주리지 않을 정도로 먹었다. 후덕한 어머니였다. 티지학원장 정아무개는 입학철이 되자 일정한 돈을 받고 송정리에 있는 정광중학교의 가짜 졸업장을 만들어주어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게 주선했다. 나는 들통이 날까봐 겁이 난 원장의 반대를 뿌리치고 광주고등학교에 원서를 냈다. 다른 애들은 원장의 권고대로 공고 등에 지원했다. 광고 입학시험 때 ‘수험번호 1404번’은 지금껏 기억하고 있다. 운동장에 들어서니 입시생들이 까맣게 몰려 있었다. 500명 정원에 5 대 1 정도의 경쟁률이었다. 명문인 서중과 북중 출신을 비롯해 지방 학교에서 1~2등 하는 수재들은 다 온 듯했다. 나는 원서를 내면서 호적이 있는 고향의 아저씨에게 연락을 해서 호적등본을 떼서 냈다. 그런데 무모하게도 나이를 고쳐서 냈다. 서류를 접수하던 나종일(훗날 한국외국어대 서양사 교수) 선생이 살펴보더니 위조한 사실을 찾아내 접수를 거부했다. 내가 애원하듯 사정을 설명하자 ‘너는 합격해도 무효’라고 어르면서도 받아주었다. 무난하게 합격한 나는 1955년 봄 마침내 고교생이 됐다. 땅에 묻어두었던 돈은 꼬깃꼬깃했으나 위조지폐는 아니어서 등록금으로 받아주었다. 그런데 난관이 또 있었다. 교과서 값이 모자란 것이다. 교과서 값을 입학 때 한꺼번에 받던 시절이었다. 서무과장이 교감 선생의 서명을 받아 오면 받아주겠다고 했다. 나는 교무실로 가서 교감에게 사정을 얘기했지만 그는 “우리 학교는 건성으로 다니는 학교가 아니야”라며 한마디로 거절했다. 나는 하루종일 교실로 교무실로 교감을 따라다녔다. 모두들 쳐다보았지만 나는 창피고 뭐고 따질 형편이 아니었고 물러설 수도 없었다. 퇴근 무렵 교감은 내 성적표를 한참 들여다보더니 “음 괜찮네. 나하고 약속 하나 하자. 앞으로 10등 안에 들어야 한다. 알겠지”라고 말했다. 나는 ‘예, 예’를 연발하면서 굳게 다짐하는 표정을 지었다. ‘오케이! 굿 이브닝!’ 교감은 전남 교육계에서 훌륭한 교육자로 칭송받은 기두석 선생이었다. 뒤에 들은 얘기지만 입학생이 하나라도 줄어들면 학교 수입은 늘어난다고 했다. 보결생에게 일정한 기부금을 받고 편입시켜 주었으니 탈락해주는 게 더 좋았을 것이다.
나는 이제 정규학교요 명문학교인 광고생이 되었다. 아침 조회 할 때에는 1500여명의 학생이 운동장에 모였다. 교복도 거의 ‘세베루’ 천으로 지은 멋진 옷을 입고 있었다. 얼굴들도 잘생긴 것처럼 보였다. 나는 1학년 1반에 배정되었는데 강홍기(시인, 필명은 임보)·박상룡(언론인) 등이 같은 반이었다. 이들은 한문도 잘 아는 우수한 학생이었다.
이이화 역사학자
이 학원은 광주역 앞에 있었는데 책상도 없이 나무의자만 일렬로 늘어놓고 강의를 했다. 좁은 교실에 40여명의 학생이 바글거렸다. 중학교 과정을 속성으로 가르쳤다. 또 이강철은 쌀값 정도만 내고 자기 집으로 와서 살라고 제의했다. 그래서 좁은 방에서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 등 네 명이 같이 지내게 됐다. 밥도 주리지 않을 정도로 먹었다. 후덕한 어머니였다. 티지학원장 정아무개는 입학철이 되자 일정한 돈을 받고 송정리에 있는 정광중학교의 가짜 졸업장을 만들어주어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게 주선했다. 나는 들통이 날까봐 겁이 난 원장의 반대를 뿌리치고 광주고등학교에 원서를 냈다. 다른 애들은 원장의 권고대로 공고 등에 지원했다. 광고 입학시험 때 ‘수험번호 1404번’은 지금껏 기억하고 있다. 운동장에 들어서니 입시생들이 까맣게 몰려 있었다. 500명 정원에 5 대 1 정도의 경쟁률이었다. 명문인 서중과 북중 출신을 비롯해 지방 학교에서 1~2등 하는 수재들은 다 온 듯했다. 나는 원서를 내면서 호적이 있는 고향의 아저씨에게 연락을 해서 호적등본을 떼서 냈다. 그런데 무모하게도 나이를 고쳐서 냈다. 서류를 접수하던 나종일(훗날 한국외국어대 서양사 교수) 선생이 살펴보더니 위조한 사실을 찾아내 접수를 거부했다. 내가 애원하듯 사정을 설명하자 ‘너는 합격해도 무효’라고 어르면서도 받아주었다. 무난하게 합격한 나는 1955년 봄 마침내 고교생이 됐다. 땅에 묻어두었던 돈은 꼬깃꼬깃했으나 위조지폐는 아니어서 등록금으로 받아주었다. 그런데 난관이 또 있었다. 교과서 값이 모자란 것이다. 교과서 값을 입학 때 한꺼번에 받던 시절이었다. 서무과장이 교감 선생의 서명을 받아 오면 받아주겠다고 했다. 나는 교무실로 가서 교감에게 사정을 얘기했지만 그는 “우리 학교는 건성으로 다니는 학교가 아니야”라며 한마디로 거절했다. 나는 하루종일 교실로 교무실로 교감을 따라다녔다. 모두들 쳐다보았지만 나는 창피고 뭐고 따질 형편이 아니었고 물러설 수도 없었다. 퇴근 무렵 교감은 내 성적표를 한참 들여다보더니 “음 괜찮네. 나하고 약속 하나 하자. 앞으로 10등 안에 들어야 한다. 알겠지”라고 말했다. 나는 ‘예, 예’를 연발하면서 굳게 다짐하는 표정을 지었다. ‘오케이! 굿 이브닝!’ 교감은 전남 교육계에서 훌륭한 교육자로 칭송받은 기두석 선생이었다. 뒤에 들은 얘기지만 입학생이 하나라도 줄어들면 학교 수입은 늘어난다고 했다. 보결생에게 일정한 기부금을 받고 편입시켜 주었으니 탈락해주는 게 더 좋았을 것이다.
이이화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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