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고교 3학년 때 학내 청소년적십자 부단장을 맡은 필자(가운데)가 대한적십자 광주지사에서 주최한 학생문예작품 당선자 시상식에서 사회를 보고 있다. 맨 오른쪽이 당시 1학년생으로 시 당선자인 이성부 시인이다.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16
나는 일단 꿈을 이루었으나 학교를 그만두고 대입 검정고시를 보기로 마음을 굳혔다. ‘광고’(광주고등학교) 모표를 달고 다방을 돌아다니니 예전보다 부쩍 관심들을 쏟았다. 그동안 내 은단을 사주지 않던 다방 손님들이 ‘내 후배가 되었다’며 몇개씩 사주며 격려하기도 하고 다방 ‘레지’(여성종업원)들도 양초 토막을 모아 두었다가 싸주기도 했다. 그런데 왠지 싫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만 해도 정전이 잦아 촛불을 켜야 했고 그래서 내가 양초 토막을 줍는 것을 본 모양이었다. 또 한가지는 동급생들보다 내 나이가 평균 3살 정도 많았다. 그 차이를 뛰어넘는 방법으로 대입 검정고시를 보려 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물건을 팔러 돌아다니다가 알게 된 화장품 장사를 하는 김아무개의 소개로 충장로 아래쪽에 있는 군수여관에서 일을 하게 됐다. 나는 거처로 정해준 ‘조바실’에 교모와 교복을 걸어두고 책상 앞에는 ‘초지관철’이라는 사자성어를 써서 붙여두었다.
며칠이 지난 뒤 어떤 노신사가 지나다가 저 교모가 누구 것이냐고 물었다. 그는 ‘제 것입니다’라는 내 대답을 듣고는 ‘너 나를 모르느냐?’고 물었다. 바로 광고의 기성회장인 김용환 선생이었다. 며칠이 지난 뒤 김 선생이 나를 부르더니 ‘교장에게 모든 걸 말해 놓았으니 학교에 가라’고 일렀다. 김 선생의 부인인 여관 주인 배진순 여사와 의논해 나를 학교에 보내주기로 합의한 것이다.
그래서 교장 장준한 선생을 찾아가 격려의 말을 듣고 한달 만에 다시 학교에 나가게 되었다. 서무과장은 고아로 모든 공과금을 면제해주기로 했으나 한가지 기성회비만은 내야 한다고 일렀다. 장 교장은 뒤에 공주교육대학장을 지내고 공화당 전국구 의원을 지내며 훌륭한 교육자라는 평판을 들었다.
다시 학교생활이 시작되었으나 여관 일과 병행하자니 고단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 무렵 통행금지는 밤 9시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사이렌이 울리기 직전 남녀가 뛰어들어오곤 하는데 방 안에서 티격태격 다투며 소란을 피운 적도 많았다. 또 ‘아가씨’를 불러달라는 사내들에게는 역전의 대인동 창녀촌에 가서 불러주어야 했다. 또 술꾼들의 소란은 말릴 수도 없었다. 나름 민감한 사춘기였던 나로서는 잠을 설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이런 소란 속에서 수학이나 영어 공부를 할 수는 없었다. 시집이나 소설을 빌려다가 귀를 막고 읽어댔다. 나는 소설의 세계에서 많은 꿈을 꾸었다. 작가가 되기도 했고 사회사업자가 돼보기도 했다.
아침이 되면 숙박비를 받는 것은 반드시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다른 종업원들은 슬금슬금 돈을 축내기 때문이다. 대충 숙박비를 받고 나면 늦어지기 마련이었다. 그때부터 아침밥을 우겨넣고 냅다 뛰어 학교로 갔다. 상습 지각생이 되고 말았다. 또 운동화를 살 돈이 없어서 여관에 버려진 구두를 신고 다녔고 바지도 나팔바지를 주워 입고 다녔다. 전형적인 불량학생의 행동과 복장이어서 교문에서나 담임선생에게서 늘 지적을 받았다.
하지만 불량학생의 딱지를 떼는 두 가지 일이 일어났다. 우리반, 1학년 1반의 교실 환경을 꾸밀 때 나는 붓글씨로 ‘덕불고 필유린야’(德不孤 必有隣也)라는 글귀를 써서 붙여 놓았다. 어느날 교장 선생이 ‘저걸 누가 썼느냐’, ‘끝의 야(也)는 왜 붙였느냐’고 물어 ‘제가 썼는데 강조하려 해서’라고 대답했다. 교장은 교무회의에서 이 일을 말하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또 하나, 당시 학교에서는 1년에 두 번 <광고 타임스>를 내고 있었다. 여기에 내 시가 실렸다. 문예 담당인 송규호 선생은 많은 투고 원고를 일일이 손질을 해서 쓴 학생들에게 나누어주게 했는데 이 일을 나에게 시켰다. 내 작품이 인정을 받은 셈이다. 담임 김종섭 선생은 이런 사실을 알고부터 불량학생 취급을 하지 않았다.
그 시절 나는 도시락을 싸갈 수 없었다. 여관으로 돌아가 점심을 먹고 올 시간도 모자랐다. 점심 먹을 시간이 되면 숲속에 혼자 앉아 도서관에서 빌려온 시집·소설 따위를 읽었다.
2학년 때 담임은 장홍종 선생이었다. 장 선생은 유능한 수학교사였다. 하지만 나는 수학시간이 되면 엎드려서 수필 한 편씩을 썼고 여관방에서도 글을 썼다. 서울의 학생잡지 <학도주보>나 <학원>에 보냈고 지역 신문에도 투고를 하면 거의 반절은 게재되었다.
한편 2학년이 되자 <광고 타임스>와 교지 편집을 우리가 맡게 됐다. 대학입시를 앞둔 3학년은 이 일에서 손을 떼게 하는 게 관례였다. 이 무렵 군수여관은 다행히 광주역 앞으로 이사를 와서 학교와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 규모도 커져서 종업원을 3명 두었으나 내 일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이이화 역사학자
이이화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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