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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회의와 방황 끝 ‘내 생애 유일한 졸업장’을 받고 / 이이화

등록 2010-11-04 09:43

필자가 광주고교 3학년 때 썼던 ‘까뮤와 창조적 윤리’ 논설이 실린 교우지 <광고> 7집(1958년도)의 표지.(왼쪽) 필자에게 문학의 길을 권유한 광고 시절 은사 유공희 선생의 유고문집인 <물 있는 풍경>. 작고 2년 뒤인 2007년 필자와 양성철(전 주미대사)·오병선(변호사)·강홍기(시인) 등 여러 제자들이 기획위원을 맡아 간행했다.(오른쪽)
필자가 광주고교 3학년 때 썼던 ‘까뮤와 창조적 윤리’ 논설이 실린 교우지 <광고> 7집(1958년도)의 표지.(왼쪽) 필자에게 문학의 길을 권유한 광고 시절 은사 유공희 선생의 유고문집인 <물 있는 풍경>. 작고 2년 뒤인 2007년 필자와 양성철(전 주미대사)·오병선(변호사)·강홍기(시인) 등 여러 제자들이 기획위원을 맡아 간행했다.(오른쪽)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17
광주의 군수여관에서 일하며 광고를 다니던 시절, 그나마 학교에서 보내는 낮시간은 적당히 활용할 수 있었다. 내 난독 습관이 왕성하게 길러진 것도 그때였다. 셰익스피어나 톨스토이나 앙드레 지드나 카뮈의 작품을 마구잡이로 읽었다. 월간 <사상계>도 애독서 목록에 들었다.

하루는 <사상계>를 옆구리에 끼고 걷다가 수학 담당 장홍종 선생에게 들켰다. <사상계>를 압수해간 장 선생은 교무실로 부르더니 내 수학 성적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이 성적으로는 서울대에 들어갈 수 없으니 <사상계> 같은 건 나중에 읽어도 되지 않느냐고 타일렀다. 나는 대답만 했지 그럴 처지도 아니었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어디 수학만인가? 물리·화학 같은 과목도 오십보백보였다. 쉽게 말하면 거의 과락 수준이었다.

3학년이 되면서 나는 교내 학예부장과 청소년적십자 부단장을 맡았다. 일주일마다 나가던 <한국방송> 광주방송국 라디오의 50분짜리 프로그램 ‘학생의 시간’ 기획도 주관했다. 또 선배들이 만든 문학 동인지인 <태광>의 편집 일도 맡았다. 나는 교지 등에 어리석음을 깨닫는다는 뜻을 따 ‘이우오’, 스스로 울린다는 뜻을 따서 ‘이자명’이란 필명을 쓰기도 했다. 겉멋이 잔뜩 들어 그야말로 바쁜 몸이 되었다.

그러다 내 문학적 재능에 대해 실망하게 되는 일이 생겼다. <전남일보>에서 전국 학생 문예작품을 모집했는데 강홍기의 시가 당선작으로 뽑히고 내 시는 가작에만 들었다. 심사를 맡은 김현승 선생은 내 시 ‘최후의 불안’을 두고 심사평에서 할 말이 많다고 했는데 그 무렵 내가 카뮈 등에 심취한 영향을 받은 내용이었다. 그때 내가 쓴 ‘까뮤와 창조적 윤리-단편 <주인>을 중심해서’라는 글의 한 대목을 보자. 유난히 경색된 논설이다.

“인간과 세계는 모순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의 불합리와 인간의 합리적 욕구가 서로 용납하지 않는 그런 이율배반에서 발생되는 부조리-이것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며 인간의 절대적인 조건이란 말이다…. 여기에서 부조리가 생기게 되고 인간은 부조리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힘으로써 어떤 것을 가지고 인간 속에서 가치를 발견케 하고 그리고 새로운 창조적 윤리로 다다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3 때 이미 스무한살이었던 나는 혈기 왕성한 청년으로서 남북 분단과 냉전·이승만의 독재를 겪으며 카뮈의 부조리 사상과 이를 풀려는 창조적 윤리관에 막연하게나마 매료돼 있었다. 이런 의식의 성장은 진행형이었다.

여관 종업원 생활이 창피해지고 싫증이 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밤 11시 통금 사이렌이 울리기 직전이면 어김없이 취객과 청춘남녀들이 밀려들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남녀가 어울려 이상스런 비명을 지르기도 하고 헐떡거리며 다투는 소리가 새벽이 되도록 들려왔다. 방음시설이 있을 턱이 없던 시절이니 나는 귀에 솜을 쑤셔넣어 막아보려 했지만 점점 견뎌내기가 어려웠다.

뭔가 탈출구를 찾아야 했다. 마침 동생 녀석이 부여 아버지 밑에 있다가 광주로 왔다. 그때 부산에서 참기름 장사를 하고 있던 어머니께 연락해 돈을 받았다. 가출한 뒤 처음이었다. 그 돈으로 산수동 언덕바지에 방을 한칸 얻었다. 그 덕분으로 여관을 나와 졸업할 때까지 학교에 편안하게 다닐 수 있었다.

내 문학 재능에 대해 회의할 무렵, 담임이자 국어 담당 유공희 선생이 문학평론가의 길을 가보라고 권했다. 유 선생은 프랑스와 일본 문학 등 너무나 많은 문예사조를 일러주었다. 입시문제 같은 것은 별로 가르쳐주지 않았다. 또 수업료를 체납해도 심하게 독촉하지 않았다. 특히 나는 기성회비를 내지 못했는데도 별로 얘기를 하지 않았다. 나는 돌아가실 때까지 선생을 찾아뵈었고 몇해 전 다른 제자들과 함께 유고문집도 내드렸다.

국사를 가르쳤던 김길 선생은 내 역사 실력을 인정하며 특히 귀여워해주었다. 그는 수업시간에 칠판에 판서를 하다가 때로 막히면 나를 쳐다보면서 이게 맞느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오며 가며 나를 볼 때마다 농담을 걸면서 웃어주곤 했다.


이이화 역사학자
이이화 역사학자
영어 담당 이종수 선생은 어느 해 여름방학이 끝난 뒤 수업에서 내게 방학을 어떻게 보냈느냐고 물었다. 내가 부산 어머니에게 가는 길에 남해안의 산들이 헐벗은 모습을 보고 나무를 많이 심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대답하니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선생은 훗날 충남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퇴직했는데 지금도 자주 통화도 하고 만나기도 한다.

이 세 분은 문예반 담당 송규호 선생과 함께 내가 살아가는 동안 잊을 수 없는 스승들이다. 그 가르침과 관심 덕분에 내 인생에서 가장 안정된 시기를 보내며 처음이자 유일한 고교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이화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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