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봄 서라벌예술초급대학(현 중앙대 예술대학)에 합격해 당시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 있던 교정에서 함께 입학한 광고 동창생들과 찍은 기념사진. 왼쪽부터 연극영화과의 김주휘씨, 필자, 문예창작과의 서요석씨.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18
1958년 봄 나는 수학이 과락 지경인 채로 서울대 사대에 응시했으나 예상대로 낙방하고 말았다. 그래서 수학 과목이 입시에 들어 있지 않은 대학을 찾아보니 서라벌예술대학이 있었다. 문예창작과 장학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또 한번 어머니에게 돈을 받아 상경해 하월곡동에 방을 마련했다.
당시 문예창작과의 교수진은 그야말로 화려했다. 김동리, 서정주, 박목월, 김구용 등이 출강했다. 학생으로는 천승세, 홍기삼, 이근배, 김주영 등이 있었다. 입학한 뒤 아버지에게 편지를 써서 중국의 고전인 <봉신연의> 등을 보내달라고 했다. 당신이 때때로 탐독하는 책들이었으나 아버지는 ‘동양고전도 열심히 공부하라’는 당부의 편지와 함께 보내주었다. 내가 처음이요 마지막으로 받은 아버지의 편지였다.
입학한 뒤 나는 당당히 명동에 나가 공초 오상순이 날마다 들르는 다방 ‘청동’에서 이름 있는 문인들을 만나기도 했고 선배인 박봉우, 박성룡, 현재훈 등을 만나 술을 얻어 마시기도 하며 대학 생활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여름방학을 앞두고 시험을 보는 도중 아버지가 위급하다는 전보가 날아왔다. 부여로 달려가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았다. 큰어머니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이화가 왔다’고 말하자 아버지는 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왜 그랬을까? 마지막으로 혈육의 정을 보여준 것일까? 아버지의 일생을 뭐라고 평가해야 할까? 부자 사이에 너무나 많은 사연이 있었지만 일단 아버지의 이야기는 이쯤에서 접어두기로 한다.
그 뒤 나는 학교에 나가는 둥 마는 둥 하다가 광주로 다시 내려왔다. 그 무렵 어머니는 광주일고에 입학한 동생을 돌보느라 광주에서 살고 있었다. 모처럼 세 모자가 한집에 사는 행복을 맛보았다. 그러다 고교 때부터 대학입시 문제를 모아 문제집을 내서 전남 일대 고교를 돌면서 팔았던 이두호 선배를 친구 박태술의 소개로 만나 나도 장사에 끼어들었다. 어느날 서울법대를 다니던 한창기(<뿌리깊은나무> 창간 발행인·1997년 작고) 선배가 ‘달고 다니면 책이 잘 팔릴 것’이라며 서울법대 배지를 주었다. 그리고 헌법은 한태연, 민법은 안이준, 국제사법은 황산덕 교수가 가르쳐준다고 일러주었다. 나는 가짜로 들통이 나지 않으려고 몇번이고 외웠다.
나는 서울법대생 배지를 달고 전국의 고교를 돌며 문제집을 팔았다. 일단 서울법대 출신 교사를 만나면 아는 체를 했다. 주로 인문고를 찾아다녔는데 춘천을 비롯해 경상도, 충청도를 돌아다녔다. 전라도는 박 선배의 몫이어서 침범할 수 없었다. 책은 조금씩 팔렸으나 여비와 여관비로 쓰고 나면 별로 남는 게 없었다. 그러나 가짜 노릇은 들통이 나지 않고 썩 잘해냈다.
언제부턴가 훌쩍 늙어버린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출세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또 너무나 초라하게 살아온 나 자신을 위해 조금 뽐내면서 살고 싶기도 했다. 이제 살 집이 있고 끼니를 때울 수도 있지 않은가. 사법고시 공부에 필요한 책을 샀다. 그리고 방 안에 틀어박혀 줄을 그어 가면서 읽었다. 당시 관련 책은 대부분 일본 것을 베꼈는데 한자는 오자투성이였다. 나는 오자를 잡아내면서 읽어냈다.
그런데 뜻밖의 사달이 벌어졌다. 심심풀이 삼아 서라벌예대에서 만난 여학생 송윤의에게 연애편지 같은 걸 써서 보냈는데 원고지에 쓴 탓인지 분량이 넘쳐 우체국에서 뜯어본 모양이었다. 그 내용이 시사에 관련된다고 해서 경찰에 이첩되었다. 나는 경찰관 두 명에게 끌려 전남도경으로 불려갔다. 그들은 나를 으르면서 간첩으로 다루었다.
조사 서류를 건너다보니 두툼했다. 사실 편지에 쓸 말이 많지 않아서, 재일동포들의 북송 행렬은 이승만이 이들을 내팽개친 탓이라거나, 살아있는 이승만 동상을 남산에 세우더니 개헌을 해서 총통 같은 영구집권을 꾀한다는 등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는 내용들로 채웠다. 그들이 볼 때 전형적인 불순분자의 얘기였다. 경찰은 물론 신상조사를 했지만 다행히 호적에 좌익활동을 했던 큰외삼촌 이름이 실려 있지 않아 연좌법에 걸리지 않았다. 친가 쪽에는 아무 탈이 없었던 모양이다. 경찰은 나를 이리저리 으르다가 두들겨 패면서 위협했다. 이어 계장에게 인사를 시키기도 하면서 돈을 내면 풀어주겠다고 은근히 흘렸다. 실제로 그들은 어머니에게, 아들이 빨갱이지만 잘 봐주겠다고 회유를 해서 돈을 우려냈다. 나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이화 역사학자
이이화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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