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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4·19땐 열성적 거리시위꾼…7월 총선 선거운동 나서

등록 2010-11-08 08:43수정 2010-11-08 09:20

서라벌예술대학을 그만두고 광주에 내려와 있다 1960년 ‘4·19’를 맞은 필자는 개인적으로 거리시위에 열성적으로 참가했다. 당시 희생당한 경희대생 이기태씨의 고향 무주에 1996년 세워진 추모비 앞에서 자신이 써준 비문을 보고 있는 필자.
서라벌예술대학을 그만두고 광주에 내려와 있다 1960년 ‘4·19’를 맞은 필자는 개인적으로 거리시위에 열성적으로 참가했다. 당시 희생당한 경희대생 이기태씨의 고향 무주에 1996년 세워진 추모비 앞에서 자신이 써준 비문을 보고 있는 필자.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19
1960년 2월 그렇게 경찰에게 시달리다 나오니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이 미국에서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예전 군수여관에서 일할 때 그가 유세를 와서 접대를 한 적이 있었다. 나는 조 후보가 음모로 살해되었다고 믿고 흥분했다. 그래서 1년 만에 고시 공부를 팽개치고 시내 거리로 나와 다시 문학하는 친구들과 어울려 술판을 벌였다. 고시 책을 한 권씩 헌책방에 팔아서 산고기집에서 토끼고기를 안주로 막걸리를 마셔댔다. 선배로 이승룡, 후배로 문순태·이훈·김석학 등과 자주 어울렸다. 선배 정현웅이 경영하는 노벨다방에서 주로 모였다. 그런 자리에서 우리는 3·15 부정선거를 저지른 이승만 정권에 대해 거리낌 없이 성토했다.

60년 4월18일부터 광주에, 고려대 시위대 습격사건이 통신으로 알려졌다.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은 밤부터 거리로 몰려나왔다. 이때 고교생 대열은 광주고와 조대부고 학생들이 주도했는데 김병욱(충남대 교수) 박석무(전 국회의원) 전만길(전 대한매일신보 사장) 고현석(전 곡성군수) 등이 앞장섰다. 19일에는 전남대 학생들이 금남로로 집결했다. 전남대 학생회 간부인 유인학과 나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펼침막을 만들 천을 찾았다. 이때까지는 전남대 학생들도 경험이 없어 시위 준비가 허술했다.

우리 시위대는 금남로에 있는 경찰국장의 사택에 돌을 던졌고 물을 뿌리는 소방차를 빼앗기도 했는데 나는 소방차에 올라 운전사를 향해 돌을 던졌다. 그러다 문득 소방수를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른 학생들을 말리며 내려왔다.

경찰은 도청 앞에서 학생들을 밀고 나오면서 아스팔트를 향해 총탄을 쏘았다. 총탄이 내 옆구리를 스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정신없이 한 주택의 높은 담을 뛰어올라 마루 밑 장작더미 속에 숨었다. 옆구리 쪽 옷자락을 만져보니 찢어져 있었다. 몇 센티미터만 안쪽으로 들어왔어도 다쳤을 것이다. 바깥이 조금 잠잠해지자 다시 거리로 나온 나는 시위대들과 동방극장 앞에 있는 자유당 당사무실로 몰려갔다. 나는 돌을 겨누어 이승만의 초상을 맞혔다. 쨍하는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리자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한 고교생이 불을 지르려 하자 나는 “불을 지르지는 말자”고 외쳤다. 다시 시청으로 몰려갈 때에도 시청에는 돌을 던지지 말라고 소리 질렀다. 밤에는 수백명이 광주경찰서로 몰려가 시위를 벌였다. 나는 목이 타고 배가 고파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아침에 깨어보니 전날 밤 경찰서 앞에서 예닐곱 명이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라디오 속보를 들으면서 서울로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서울로 올라와 광화문 거리를 둘러보니 혼란스런 속에 총탄 흔적이 여기저기 보였다. 19일에 경무대(청와대) 앞인 효자동 길에서 많은 사상자가 났다는 소문을 듣고 더욱 흥분되었다. 곧 계엄령이 선포되고 계엄군이 출동했지만 그들이 총을 쏘지 않고 우호를 보이자 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환호했다. 이승만이 하야 발표를 할 때에도 나는 몇몇 친구들과 모여 환호의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나는 당시 대학생도 아니었고 조직에 들어 시위대에 낀 것도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자발적으로 거리를 헤맸던 것이다. 다시 말해 주변부에서 거들어주는 축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때부터 늙어서까지 열성적이 시위꾼이 되었다.

그해 7월 첫 민의원과 참의원 선거가 있었다. 광고를 다니게 해준 은인인 김용환 선생이 광주에서 민주당 후보로 민의원 선거에 입후보했다. 당시 학생들의 주가가 매우 높아서 나도 선거운동에 뛰어들었다. 친구인 황승우와 박봉간 등도 동원했다. 김 선생의 아들인 김양균(변호사)·남균(물리학 교수) 형제도 선거운동에 나섰으니 내가 이끄는 학생 선거운동원들은 방계였던 셈이다.


이이화 역사학자
이이화 역사학자

나는 학생 선거운동원을 데리고 마을마다 돌아다니면서 김용환 후보의 양심과 인품을 선전했다. 선거 결과 김 선생은 압도적인 표 차이로 당선되었다. 선거가 끝난 뒤 나는 한동안 군수여관에 머물면서 빈둥거렸다. 고교 동창인 박봉간과 친구인 황승우들과 어울려 다녔다. 박봉간은 동기로 함께 문예활동도 했고 청소년적십자 활동도 했다. 그는 부잣집 아들이어서 그의 집에 자주 놀러 갔는데 어머니가 나를 무척 싫어했다. 고아인데다가 양말에서 꼬랑내가 난다고 외면했다. 또 그의 아버지도 나를 보면 불량소년으로 취급하고 인사도 잘 받지 않았다. 문학을 하는 학생들을 싫어한다고도 했다. 하지만 박봉간과는 아주 친하게 지냈다.

이이화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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