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학 시절 광주에서 만난 평생지기 황승우(왼쪽)와 2003년께 전남 곡성 태안사를 함께 답사한 필자. 고학으로 대학에 들어간 황승우는 영어를 잘해 광주일고 등에서 영어교사를 지내면서 동생 지우(시인) 등 많은 제자를 길렀다.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20
친구 황승우는 여관에 잡화 팔러 다니는 고학생으로 부모와 동생들까지 온 가족을 먹여 살렸다. 하지만 그의 집에 놀러 가면 언제나 반겨주었다. 그는 고등학교에 다니지 않고 혼자 영어 공부에 열중해 뒤에 검정고시로 전남대 영문과에 들어간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의 세 동생, 병우(교사 출신), 지우(시인·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광우(민주운동가·저술가)는 지금도 내 동생처럼 지내고 있다.
대학 졸업 뒤 황승우는 광주일고 등에서 영어교사로 지내면서 많은 제자를 기른 교육자였으나 지금은 불자가 되어 수도에 열중하고 있다. 청년시절부터 많은 대화를 나누며 지낸 그와 나는 평생의 지우다.
‘4·19’의 광풍이 지난 뒤 나는 다시 광주의 군수여관에서 빈둥거리며 밥을 얻어먹고 지냈다. 그때 주인댁 배진순 아주머니가 초등학교 6학년 아들 김상균의 학습을 도와달라고 해서 팔자에 없는 가정교사 노릇을 하게 되었다. 상균이는 아주 영리해 나는 학과를 별로 가르쳐준 기억이 없다. 그는 지금도 만나면 학과는 배운 기억이 없고 <몽테크리스토 백작>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은 기억만 남아 있다고 말한다. 그는 <문화방송> 기자와 광주문화방송 사장을 지낸 뒤 지금은 광주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나는 한동안 그렇게 지내다가 다시 서울로 왔다. 여기저기 친구들 집을 찾아다니면서 잠자고 밥을 얻어먹으면서 지냈다. 특히 동숭동에 있는 서울법대생 정용식(변호사)의 하숙집에서 여러 번 신세를 졌다. 그는 주인 아주머니한테 사정을 해서 한 그릇 더 얻어와 나를 먹이곤 했다. 그러나 너무 잦으니 나중엔 자기 몫의 밥을 내게 주고는 학교로 가버렸다. 결국 내 옷에 있던 이가 하숙집 전체로 번지는 바람에 너무 미안한 생각이 들어 발길을 끊었다.
어느날은 외대에 다니는 친구 이시호(외교관·대사)의 하숙집으로 찾아갔는데 통금이 다 된 밤 11시가 되도록 들어오지 않아 서울의대 구내로 가서 혼자 밤을 새운 적이 있다. 밤이슬에 젖어 있다가 동쪽을 바라보면서 해가 돋기를 기다렸다. 자살을 해볼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나는 어머니에게 서울로 이사하자고 얘기했다. 어머니는 광주에 정이 들어 떠날 생각이 없었으나 반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허름한 집을 팔아 서울로 옮겨왔다. 동생은 고3이어서 당분간 광주에서 하숙을 하기로 했다.
나는 하왕십리에 문방구를 곁들여 파는 만홧가게를 차렸다. 그런데 경험이 없는 내가 돈을 아끼려고 싸구려 ‘덤핑만화’를 사서 진열해 놓으니 꼬맹이들이 뻔히 알고 별로 보러 오지 않았다. 5~6개월 만에 실패해 동생 하숙비도 보내주지 못했다. 때마침 대학 입시철이어서 동생도 올라와 하월곡동에 겨우 월세방 한 칸을 얻어 세 식구가 다시 모여 살게 됐다.
어머니는 다시 식모 노릇도 하고 밭일을 해주고 시래기를 얻어 팔기도 했다. 나 역시 다시 험한 생활전선에 나섰다. 동방생명보험에서 전혀 성과를 내지 못해 교육보험으로 옮겼다. 그럭저럭 성과를 올려 됫박쌀을 살 수 있었다.
그러자 한번 모험을 하고 싶어졌다. 동생 친구인 박아무개와 일단 여수로 내려갔다. 김해여관에 숙소를 정하고 여수시장을 돌면서 집단으로 보험에 가입시키는 작업을 벌였다. 한달이 지나도 성과가 없었다. 여수보육원 박이래 원감이 눈치를 채고 나를 불렀다. 그는 보험을 듬뿍 들어주었는데 한달 넘게 밀린 여관비를 계산하고 있었던 같다. 그 덕분에 겨우 여관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다시 광주로 왔다. 광주 숭실고에는 광고 시절 교사였던 박상훈 선생이 교장으로 있었다. 박 선생에게 사정을 얘기하니 제자를 유난히 아끼는 그는 모든 교직원이 보험에 들게 알선해주었다. 광주일고에는 고교 은사 이종수 선생의 동생 이종태 선생이 재직하고 있었다. 이분에게 부탁해 학생 명단 일부를 알아냈다. 학생들의 집을 방문해 학교에서 나온 것처럼 가장을 하고 보험에 가입시켰다.
그리고 서울로 올라와 교육보험 지부에 가보았더니 일단 보험 계약금 납입을 한 뒤에 수당을 주는 것이라며 미리 쓴 수당을 모두 게워내라고 했다. 하지만 이를 낼 길이 없었다. 내 잘못도 있었지만 실은 지부장이 내 보험 계약금을 가로챘던 것이다. 사기를 당한 꼴이었다. 내 악운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거의 빈손으로 다시 어머니에게 왔다. 그사이 동생은 군대에 가고 없어서 어머니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이를 어찌하나? 이이화 역사학자
그러자 한번 모험을 하고 싶어졌다. 동생 친구인 박아무개와 일단 여수로 내려갔다. 김해여관에 숙소를 정하고 여수시장을 돌면서 집단으로 보험에 가입시키는 작업을 벌였다. 한달이 지나도 성과가 없었다. 여수보육원 박이래 원감이 눈치를 채고 나를 불렀다. 그는 보험을 듬뿍 들어주었는데 한달 넘게 밀린 여관비를 계산하고 있었던 같다. 그 덕분에 겨우 여관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다시 광주로 왔다. 광주 숭실고에는 광고 시절 교사였던 박상훈 선생이 교장으로 있었다. 박 선생에게 사정을 얘기하니 제자를 유난히 아끼는 그는 모든 교직원이 보험에 들게 알선해주었다. 광주일고에는 고교 은사 이종수 선생의 동생 이종태 선생이 재직하고 있었다. 이분에게 부탁해 학생 명단 일부를 알아냈다. 학생들의 집을 방문해 학교에서 나온 것처럼 가장을 하고 보험에 가입시켰다.
이이화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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