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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위암 투병’ 어머니 여의고…정치인 연설문 쓰며 밥벌이 / 이이화

등록 2010-11-11 09:00수정 2010-11-11 17:57

2000년 추석 때 경기도 구리시 망우리에 있는 필자(왼쪽)의 어머니 ‘밀양 박씨’ 묘소에서 선친의 주역 제자이자 셋째 형수(김함장·오른쪽)와 그의 아들 이응문(동방문화진흥회장·앞쪽) 부부 등 가족들이 성묘하고 있다. 필자는 81년 2006년까지 망우리 인근 아치올에 살며 모친 묘소를 돌봤다.
2000년 추석 때 경기도 구리시 망우리에 있는 필자(왼쪽)의 어머니 ‘밀양 박씨’ 묘소에서 선친의 주역 제자이자 셋째 형수(김함장·오른쪽)와 그의 아들 이응문(동방문화진흥회장·앞쪽) 부부 등 가족들이 성묘하고 있다. 필자는 81년 2006년까지 망우리 인근 아치올에 살며 모친 묘소를 돌봤다.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22
1963년 무렵 서울 남대문시장 입구 남대문극장 2층에 남대문클럽이 있었다. 여기에 보증금 2만원을 걸고 ‘3번 웨이터’로 들어갔다. 보증금은 어머니가 친정에 가서 마련해줬다. 그런데 경험이 없다 보니 곧 사술에 걸리고 말았다. 남대문경찰서 형사반장 일행이 남대문 상인들과 어울려 외상을 먹어대더니 한 달이 가도 갚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끝내 떼이고 말았다.

친구 박철에게 빌린 보증금으로 명동 사보이호텔 밑에 있는 ‘뮨헨’에 웨이터로 들어갔다. 이곳은 오늘날의 룸살롱과 비슷한 구조였다. 여기서도 외상 술값에 시달렸다. 게다가 가출하거나 아르바이트하는 여대생들이었던 술집 아가씨들의 상담역을 도맡아 때로는 작은 돈을 보태주기도 했다. 물론 그 아가씨들과 절대로, 한번도 성적 관계를 맺지는 않았다. 또 취직을 못했거나 막 취직을 한 친구들이 몰려오면 술과 밥을 사주곤 했다. 결국 웨이터 노릇도 몇달 만에 떨려났다.

이번엔 가정교사 하는 친구들이 하듯이, ‘전직 교사’라고 <조선일보>에 세 줄짜리 광고를 냈다. 전화 연락처는 서울 문리대 앞의 학림다방으로 했다. 한 자리를 얻긴 했으나 수학에 어두우니 고등학생 과외는 힘들었고, 대신 회현동에서 동성중학교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성적이 올라 1년을 버텼다.

이렇게 낙백한 생활을 하면서 자주 명동 청동다실로 오상순 선생을 찾아갔다. 어느날 그곳에서 만난 최종화라는 분이 <불교시보>를 창간한다며 기자직을 제의했다. 순간인 이 시보에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으면서 출근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르포 같은 걸 쓰면서 전국의 사찰을 돌아다녔다. 고승들도 많이 만났고 불교 지식도 조금씩 알게 되었다. 한문을 알았으니 불경도 아는 체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아무튼 지면을 거의 내 글로 채웠다. 그때 마침 남대문로에 국립도서관이 있어서 틈만 나면 드나들었다. 한국사 관련 책은 종류나 성격을 가리지 않고 읽었다. 물론 한문투성이였다. 특히 진단학회에서 편집한 <한국사>는 기초를 다지는 교과서였다.

이렇게 3년쯤 보내자 신문 발행을 건너뛰기도 하고 월급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마침 대전에서 아버지 제자가 운영하는 홍륜학원에서 국어와 한문을 가르쳐 보라는 제의가 왔다. 교장 간홍균 선생과 장이덕 선생 등이 가정부나 공장 종업원을 모아 주야간으로 열었는데 정규학교는 아니었다. 대전으로 내려간 나는 효천동의 심광사에서 숙식을 하며 불교학생회를 지도했다. 가끔 적으나마 서울의 어머니와 동생에게 월급을 보낼 수도 있었다.

나는 제법 무서운 한문 선생이었다. 날마다 한자를 써오라는 짧은 숙제를 내고 해오지 않으면 대나무 자로 팔뚝을 다섯 대쯤 어김없이 때렸다. 그때 5급 공무원 합격생이 가장 많이 나왔는데 한문과 국어 실력 덕분이라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일요일마다 학생 법회를 열고 방학 때는 계룡산 봉은사 등에서 수련회도 해서 심광사 주지 대의스님은 늘 만족해했다. 즐거운 나날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다리가 자꾸 붓는다는 어머니를 친구인 지정관의 누님이 있는 메디컬센터에 모시고 갔더니 위암 말기 진단이 나왔다. 참담했다. 끝내 이렇게 돌아가시는구나. 며느리와 손자를 그렇게 보고 싶다고 하시더니 결국 허사로구나.

나는 대전 생활을 청산하고 두어달 시한부 생명만 남은 어머니의 마지막을 모셨다. 어머니는 임종을 하면서 “나는 팔자가 센 여자다. 내가 죽어야 너의 형제들이 잘 풀릴 것이다”라는 유언 아닌 유언을 남겼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날, 쌀도 떨어졌다. 67년 1월4일(음력) 67살로 한 많은 한 여인은 너무나 조용하게 이승을 떠나갔다.

홍기삼, 임종달, 이현구, 신원영, 나형수 등 친구들이 몰려와 부의금으로 초상을 치러줬다. 어머니는 음력 정초 몹시 추운 날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혔다. 이때 도움을 준 친구들을 평생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의 한은 더욱 가슴에 맺혔다.

어머니가 없는 하월곡동이 싫어 수유리로 옮겼으나 여전히 군 기피자로 취직은 막막했다. 대전의 이명규 선생을 찾아갔더니, 공주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하는 오촌 당숙인 이병주 선생의 연설문을 써보라고 권해 앞뒤 가릴 것 없이 그곳으로 갔다.

이이화 역사학자
이이화 역사학자

이병주 선생은 대구사범학교 출신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2년 선배였다. 이 인연으로 공주에서 입후보했던 것이다. 나는 연설 원고를 써주면서 밥을 얻어먹었고 많은 사람들을 사귀기도 했다. 또 그의 신당동 집에도 자주 드나들면서 신문 잡지의 기고문을 대필하기도 했다.

그분은 나를 무척 귀여워해 주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수치까지는 아니나 자랑스럽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가 비록 여당 국회의원이 되었으나 따지고 보면 내가 특별히 부탁할 일도 없었다.

이이화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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