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살 무렵 병역 면제로 신분 제약이 풀린 필자는 1968~69년 시사월간지 <신동아>의 부록으로 펴낸 <한국 고전 백선>(사진)의 기획과 편집에 참여했다. 책 머리말 부분에 고전 추천을 한 전공 학자들의 명단과 함께 편집 실무를 맡은 필자와 민병수·최범서씨의 이름도 적혀 있다.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23
1967년 들어 나를 묶고 있던 병역기피 족쇄가 풀렸다. 자진 신고를 해서 소집영장을 제때 받아 논산훈련소와 조치원 예비사단에서 두차례 신체검사를 받았다. 사실 입영 적령기를 10년 넘게 지난 31살이었으니 입대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면제받을 요량으로 밥을 며칠씩 굶고 설사약을 먹어가면서 몸무게를 45㎏ 이하로 줄였다. 그 결과 무종 판정을 받고 정식 면제되었다. 당시 여느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돈을 쓴 것도, 평화를 사랑해 입대를 기피한 것도 아니었다.
그해 가을 나는 동아일보사 출판부에 임시직원으로 들어갔다. 친구인 홍기삼이 연줄을 놓아 <동아연감> 교정 일을 하게 되었다. 나는 한문과 문장을 잘 안다고 해서 인문 내용을 다루는 특집 등의 교정을 도맡아 보았다. 이갑수 부장과 이규직, 최영식, 이종석, 정흥렬 등 선배들이 있었다.
첫 월급을 받은 날 동생과 나, 두 식구가 먹을 한달치 쌀과 연탄을 사놓고 보니 마음이 넉넉했다. 그래서 이튿날 아침 출근을 하면서 김상만 사장실을 향해 평생 이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임시직이었으니 애초 6개월쯤 근무한 뒤 책이 나오면 그만둬야 했는데 다행히 실력을 인정받았는지 계속 일할 기회가 생겼다. 이듬해 여름 월간 <신동아>로 옮긴 이종석 선배가 <한국 고전 백선>을 신년 부록으로 발행하는데 함께 하자고 했다. 시사월간지로는 신동아가 가장 인기를 끌던 시절이었다. 나는 기획 단계부터 실무를 맡았다. 여러 전공 학자들에게 서목을 추천받는 일, 필자를 정하고 원고를 받는 일, 원고를 다듬고 수정하거나 교정하는 일까지 모든 과정을 맡아보았다. 민병수(서울대 교수), 최범서(소설가) 등이 도움을 주었다.
그 덕분에 이병도, 이숭녕, 이희승, 홍이섭 등등 당대 손꼽히는 학자와 관련 전공자들을 거의 다 만날 수 있었다. 그들과 얽힌 몇가지 잊히지 않는 일화도 있다.
혜화동에 살고 있는 박종홍 교수를 찾아갔을 때였다. 마침 주역 책이 옆에 쌓여 있어서 아는 체를 했더니 그는 나를 그윽한 눈길로 쳐다보며 젊은이가 주역을 안다고 칭찬해 주었다. 자신은 주역을 변증법적으로 푸는 게 평생의 학문적 목표라고 말했다. 정말 존경스러웠다. 그런데 얼마 뒤 다시 찾아가서 주역 저술을 진행하느냐고 물었더니 민족혼을 함양하는 일이 더 급해 일시 중단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지”라고 강조했다. 나는 어리둥절했지만 더 물어보지 않았다. 다만, 가족들이 마루에 밥상을 차려놓고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물러 나오면서 ‘손님 밥 대접도 않는구나’ 혼자 중얼거렸다. 그 며칠 뒤 신문을 보니 그가 대통령 교육문화담당 특별보좌관으로 발령이 났다. 70년 12월이었다. 그때에야 ‘비빌 언덕’이 권력자임을 알아차렸다. 앞서 두해 전 선포된, 박정희 정권의 지배 도구라 할 ‘국민교육헌장’도 그의 손에서 나왔다.
연세대 이가원 교수도 생각난다. 그에게 <열하일기>의 해제를 부탁하러 갔더니 상중이어서 마침 누런 상복을 입고 있었는데 ‘한국학은 자기가 다 한다’는 듯이 아주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면서 <열하일기> 해제는 자신이 민족문화추진회에서 펴낸 책에 쓰여 있으니 그걸 베껴 실으라고 했다. 그 말대로 이를 요약해 실었더니 이종석 선배가 원고료를 대신 쓰라며 내게 줬다. 그러자 그는 원고료를 보내주지 않는다고 손세일 부장에게 항의를 했고, 결국 이 선배와 내가 반반씩 게워내야 했다. 그는 나를 노려보면서 ‘젊은 애들이 원로학자 대접을 이따위로 한다’고 호통을 쳤다. 사실 그가 번역한 고전들은 오역투성이였고 비문 따위 글은 어법에도 맞지 않았다. 그런데도 왜 명망 높은 학자로 알려졌을까.
또 한 사람, 국보라 자칭하던 양주동은 기묘한 인물이었다. 종종 그의 부인이 원고를 들고 왔는데 “양 박사는 국보이고 원고 수준도 다르니 원고료를 다른 사람보다 두 배는 줘야 한다”고 우기며 앉아 있었다. 하나의 코미디 같은 장면이었다. 아무튼 들어온 원고의 3분의 2는 그야말로 수정을 거치지 않으면 실을 수 없었다. 앞뒤가 잘 맞지 않았고, 국한문 혼용의 글은 원전 해석도 틀린 곳이 많았다.
좋은 인연도 있었다. 청명 임창순 선생은 성균관대 교수로 4·19 교수시위를 주도하고 64년 인혁당 사건에 연루돼 중앙정보부에서 고문을 받고 해직됐다. 그 뒤 차린 태동고전연구소 사무실로 찾아갔더니 선생은 바둑을 두고 있다가 대뜸 “당신, 왜 왔소”라고 톡 쏘았다. 정보부원으로 오해한 것이다. 그에게 서목을 추천받고 고전에 대한 얘기를 나누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 임 선생이 쓴 <한문 문법> 책을 얻어 학습했고, 민족문화추진회에 있을 때는 스승으로 모셨다. 청명은 제자를 아끼고 키우는 훌륭한 지사요 교육자였다.
이이화 역사학자
이이화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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