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1월 박정희 정권은 유신헌법 반대, 개헌 지지 성명에 참여한 문인 가운데 5명을 간첩으로 조작해 구속했다. 이호철(왼쪽부터)·임헌영·김우종씨 등이 재판을 받고 있다. 이들과 친하게 교유했던 필자는 큰 충격을 받고 저항 의지를 다졌다.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26
유신독재 시절, 내 의식을 혼란스럽게 만든 사건이 있었다. 1974년 2월 무렵 이른바 문인간첩단 사건이 발표되었다. 곧 신문을 통해 이호철, 김우종, 정을병, 장백일, 임헌영 등 5명의 문인을 일본에서 발행하는 잡지 <항양>과 연계해서 북한을 돕는 간첩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구속기소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나는 이들 5명과 약간씩 안면이 있었고 그 가운데 임헌영은 친구였다.
나는 서대문 밖에 있는 기자촌에 차린 임헌영의 신혼집에도 가끔 찾아갈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그는 유신에 대한 외국의 반응이라든지 북한의 사정 등을 일본 자료를 통해 알려주기도 했다. 그런 그가 간첩 혐의를 받았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천관우 선생도 연루자로 정보당국에 불려가 시달림을 받았다. 나는 이들의 재판을 몇 차례 방청했다. 아무 혐의가 없는 그들은 당당하게 자신들의 소신을 폈지만 재판부는 유죄로 인정하고 집행유예로 풀어주었다. 이 사건은 당시 유신 반대 운동에 앞장서는 문인들을 압박하려는 공작이었다.
이 사건을 겪으며 새삼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민주운동에 동참할 것인지, 그저 멀리서 바라만 볼 것인지 갈등과 혼란에 빠졌다. 그러다 역사 공부와 대중화를 통해 이 시대적 고민을 풀어보기로 작정했다. 현실에 맞설 용기가 없어 지극히 도피적인 자기호도의 논리를 끌어댄 것이다.
그 무렵 나는 해마다 불광동 천관우 선생 댁으로 세배를 드리려 다녔다. 정초에는 많은 사람들로 집이 북적거렸다. ‘동아투위’의 자유 언론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백낙청 등 문인, 김상현 같은 정치인들도 찾아왔다. 천 선생은 그 독한 소주잔을 거절하는 일이 없었다. 내게 그날은 세배객들로부터 정보를 듣거나 대화에 끼어들기도 하면서 많은 인사들과 안면을 넓히는 자리로 유익했다.
어쨌든 나는 본격으로 한국사를 공부하려면 원전을 능숙하게 읽을 수 있는 정도의 한문 실력을 길러야겠다고 판단했다. 여러 한국사 관련 일을 하면서 내 한문 지식의 한계를 절실히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한국 고전 백선> 작업 때 만났던 임창순 선생을 찾아갔다. 임 선생은, 그때 인혁당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성균관대 교수 자리에서도 쫓겨나 낙원상가 앞과 탑골공원 옆에 태동고전연구소를 열어 한문을 가르치고 있었다.
또 마침 민족문화추진회(민추)에서 국역연수원을 열고 국역자 양성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성낙현, 신호열, 임창순 등 당대 쟁쟁한 원로 한학자들이 연수원 강사로 나섰다. 74년 봄 국역연수원 시험에 합격한 나는 야간 강의를 듣고 낮에는 국역사업의 일을 보았다. 월급은 나 혼자 살아가기에는 어렵지 않게 주었다. 학벌을 전혀 따지지 않고 순전히 한문 실력 위주로 사람을 써준 덕분이었다.
10여명의 국역위원도 정규 학교를 졸업한 사람들과 나처럼 한문 공부만 한 사람들, 두 부류가 있었다. 연수원 수강생들도 이와 비슷했는데 전공 과목을 위해 한문 실력을 길러야겠다는 생각으로 들어온 사람들도 있었다. 국역위원으로는 김성환(전주대 교수), 이정섭(한문학자), 김동주(한문학자) 등, 연수부의 수강생으로는 정광호(인하대 교수), 은정희(서울교대 교수), 이전문(<조선일보> 편집부장), 조광(고려대 교수) 등이 청강했다. 또 학습부의 수강생으로는 정양완(성신여대 교수), 조준하(동덕여대 교수), 부정애(서울대 강사), 정태현(한문학자), 이택휘(서울교대 총장) 등이 있었다.
그런데 원로 강사들 중에는 습관처럼 당색을 따지고 지역을 가리며 양반을 구분하는 노인들도 있었고, 수강생들 중에도 지나치게 ‘경서’ 주석식 사고를 가진 이들이 있었다. 이곳에서도 나는 술 마시는 습관은 버리지 못했으나 사람들과 어울려 대화도 종종 나누며 지냈다. 그때 고려대 대학원 과정으로 백산학회와 한국사연구회 간사 일도 하던 조광은 내가 즐겨 찾던 대화 상대였다. 아무튼 그 시절 나는 한문 원전을 통해 한국사 연구에 본격적으로 몰입했고, 집에 들어와서는 한국사 관련 책을 읽는 데 열중했으며, 책을 사느라 늘 월부금에 시달렸다. <동아일보> 근무할 때부터 월부로 사는 책값이 수입의 3분의 1쯤 되었다. <왕조실록> 등 한국사의 기본 서적은 거의 장만해 지금도 소중하게 소장하고 있다.
이이화 역사학자
이이화 역사학자
이이화 역사학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