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척사위정론·북벌론 비판적 검토…성공적 학계 데뷔 / 이이화

등록 2010-11-18 09:14수정 2010-11-18 11:54

필자의 한국 역사학계 등장을 알린 첫 논문 ‘북벌론의 사상사적 검토’가 실린 <창작과 비평> 1975년 겨울호. 당시 이른바 유신정권 정당화에 동원된 일부 어용학자들의 논거를 정면으로 반박해 주목을 받은 글이다.
필자의 한국 역사학계 등장을 알린 첫 논문 ‘북벌론의 사상사적 검토’가 실린 <창작과 비평> 1975년 겨울호. 당시 이른바 유신정권 정당화에 동원된 일부 어용학자들의 논거를 정면으로 반박해 주목을 받은 글이다.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27
1970년대 중반 민족문화추진회의 사무실은 동대문구 신설동의 뒷골목에 있다가 청량리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겼다. 그래서 광화문으로 놀러 나가기가 여의치 않았다. 자연히 근처에서 ‘한문쟁이’들과 어울렸으니 개인적으로 다행이었다고 할까?

그무렵 나는 시간이 나는대로 논문 쓰기에 집중했다. 하숙집에서 글을 쓸 때는 거의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 이게 내 나름대로 정해둔 생활 신조요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이 대목에서 유신정권의 학술 정책에 대해 한 가지 말해 둘 것이 있다. 학자들을 어용으로 매수해 이용하기도 하고 교수들을 동원해 이미지 조작을 꾀하기도 했다. 그러나 학술 논문에 대해서는 유신을 반대하는 따위 현실 정치문제를 직접 다루지만 않으면 방관하는 자세를 보였다. 순수학문 분야는 건드리지 않았던 것이다. 들은 얘기로는 대통령정치담당 특별보좌역을 지낸 이용희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가 박정희에게 건의한 것이라고들 했다.

그렇지만 짧은 글이나마 잡지 등에 발표하면 가끔 정보요원의 전화를 받았다. 예를 들면 ‘파벌’ 같은 제목의 글에서, 이름 끝에 ‘스키’나 ‘프’ 같은 음이 달려 있으면 ‘소련 학자가 아니냐’고 물었고. ‘아니, 미국 사회학자요’라고 답하면 전화를 끊었다. 그럴 때면 참 한심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꼬투리를 잡히지 않으려고 자기 검열을 하게 되었다. 또 술에 취해 거리를 가다가도 미행자가 있나, 뒤를 힐끔힐끔 돌아보면서 실체 없는 공포를 의식하기도 했다.

당시 서울대 최창규 교수와 영남대 홍순창 교수가 한국정치사 또는 한국사상사 관련 논문을 여러 곳에 발표했다. 또 서울대 한영우 교수는 <정도전 사상의 연구>를 단행본으로 간행했다. 요약하자면, 선조의 소중화의식을 문화자존의식(한영우), 주자학적 성리학을 한국의 정통사상 또는 주체사상(최창규), 존명배청에 근거를 둔 북벌론을 한국적 주체사상(홍순창)이라는 논지였다.

나는 이들 논문의 관점에 대해 심한 갈등을 겪었다. 어떻게 민족주의와 주체성을 설파하면서 조선시대 유학자들 특히 노론들이 내세운 주자학적 중화주의에 토대를 둔 척화파의 존명배청 이론을 내세우는 것인가? 당시 유신정권은 입만 벌리면 ‘한국적 민주주의’ ‘한국의 주체성’ ‘우리식의 민족주의’ 따위를 내걸고 유신의 정당성 또는 당위성을 호도하려 들었다. 위의 논지들은 이런 시대상황에 영합한다고도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첫째 주체성의 한국적 정의, 존명배청의 역사적 전개, 북벌론과 대의의 소재 등으로 나누어 나름의 반론을 정리해 <창작과 비평>에 투고했다. 염무웅 당시 주간은 고심 끝에 내 논문의 분량을 줄이고 각주 형식도 정리해서 1975년 겨울호에 실었다.

논문이 발표되자 반응이 매우 뜨거웠다. 천관우 선생은 논리가 바로 선 좋은 ‘역사평론’을 발표했다고 칭찬해주었고 <창작과 비평> 발행 10돌 기념 좌담회에서 이우성 교수(성균관대)는 좋은 논문의 하나로 거론하면서 “역사 상황을 바르게 판단한 글”이라고 평가해주었다. 이런 격려에 나는 사뭇 고무되었다.

다음 논문은 ‘척사위정론의 비판적 검토’였다. 위에서 거론한 최창규 홍순창 등 교수들은 19세기 중·후반기 전통 유림들이 벌인 서학(기독교)의 배척·서양문물의 거부·개항의 반대 곧 척사위정운동을 두고서도 민족주체의 확립과 정학의 수호라는 관점에서 논지를 펴는 논문들을 연달아 발표했다. 성균관의 전통유림들과 유승국 등 성균관대 유학대학의 교수들도 이들의 편을 들었다.

내가 관심을 계속 기울이자 국학연수원에서 강의를 받고 있는 조광 교수가 한국사연구회의 심포지엄에서 나더러 발표를 해보라고 제의했다. 조 교수는 간사의 자격으로 회장인 강만길 교수에게 상의해, 최창규 교수와 나란히 주제발표를 하기로 약속했다. 한국사 당면의 쟁점으로 삼아 찬반 토론을 벌여 관심의 모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 교수에게 전해듣기로, 최 교수가 나오기를 거절해서 약간 중도적인 관점을 가진 이화여대의 진덕규 교수로 바뀌었다.


이이화 역사학자
이이화 역사학자
진 교수와 나는 크게 관점이 다르지 않아 기대했던만큼 열띤 토론이 벌어지지 않았다. 다만 성대 유학대학에서 유학을 전공한 아무개가 나와서, 화서 이항로 선생은 선현인데 호나 존칭을 붙이지 않고 이름을 마구 부른다는 따위 몇 가지 하찮은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자 사회를 맡고 있던 강 교수가 나서서 역사 인물에 대해서는 객관성을 위해 존칭을 붙이지 않는다’는 등등 엉뚱한 질문에 반박성 답을 했다.

아무튼 이 발표회는 한국사연구회에서 기대했던 대로 성공을 거두었다. 뒷풀이 자리에서 김용섭·정창렬 교수는 한결같이 나를 격려해 주었다. 나는 감동했다. 첫 데뷔치고는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이이화 역사학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1.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2.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3.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4.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5.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