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겨울 필자와 친구의 소개로 만난 공무원 출신 김영희씨의 결혼식 장면. 마흔 넘은 신랑과 12살이나 어린 신부의 결합인데다 이숭녕 교수의 주례사로 나름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29
1976년 〈뿌리깊은나무〉와 〈월간중앙〉에 연재했던 글들은 훗날 〈한국의 파벌〉과 〈역사와 민중〉이란 제목으로 어문각에서 간행되어 한때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80년 들어 신군부에서 마구잡이로 신문을 통폐합하고 잡지의 발행을 정지시킬 때 두 잡지가 여기에 포함되었다. 더욱이 마지막 정간 통고를 받고 나서 〈월간중앙>종간호와 <뿌리깊은나무>종간호에 내 글을 실었다. 특히 〈뿌리깊은나무〉종간호인 80년 6·7월 합병호에는 새 원고를 준비할 겨를조차 없어서 단행본으로 준비하던 <허균의 생각>초고 가운데 ‘정치 생각’(200자 원고지 400장)으로 메웠다. 나중에 김형윤 주간에게서 들으니 이 글 때문에 신군부의 미움을 더 받았다 한다.
이 대목에서 개인생활 얘기로 돌려보자. 나는 우리 나이로 마흔한살이 될 때까지도 장가를 가지 못했다. 첫째 이유로는 양친 부모가 다 떠난 까닭에 느긋하게 마음을 먹은 탓이었고 내가 목숨을 걸고 따라다닐 만큼 매력적인 여성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 마음에 드는 여성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돈도 없고 볼품도 없고 출세도 못하고 여성을 ‘끄는 재주’도 없는 나였지만 나한테 관심을 품은 여성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어찌어찌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말해야 가장 정확할 것이다.
76년, 가깝게 지내던 후배 윤구병이 이런 내 처지가 안쓰러웠던지 어느날 화가인 아내 김미혜의 친구인 김영희를 소개해주었다. 중매쟁이라 할 윤구병이 나이, 학력 등 속인 게 많았지만, 그이는 공무원으로 독서를 제법 즐겨 내 글도 읽어본 독자였다. 여러 차례 데이트를 한 끝에 결혼하기로 뜻을 맞추었는데, 신붓감이 우리 나이로 스물아홉 살이어서 그해를 넘기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정작 내게는 결혼 비용이 거의 없었다. 주위에서 마련해준 곗돈도 모두 써버린 마당이었다. 그래서 사무실에서 겨우 돈을 가불해 약간의 예물을 사주고 살 방을 구할 돈도 턱없이 모자라게 전달했다. 결혼식 장소는 비좁은 출판회관을 잡은 탓으로 하객들이 서 있을 자리도 없었는데 3분의 2가 신부 쪽 하객이었다. 또 그 하객들이 세무공무원이요 신부가 인사과 주사여서인지 축의금 봉투도 두둑했다. 이와 달리 내 하객은 빈털터리 문인 등이 많아서 봉투도 초라했으며 우리 집안의 하객들도 비슷한 처지였다.
주례는 서울대 교수인 이숭녕 선생이었다. 이 선생과 나의 인연은 조금 특별했다. 그분은 내가 <월간중앙>에 쓴 ‘광해군론’을 읽고 대학생들의 필독서인 <논문작성법>에 모범 논문으로 실어주었다. 같은 ‘연안 이씨’ 일가라고 하자 “우리 문중은 문인 집안이야”라며 자부심을 키워주기도 했다. 그런데 주례를 하면서 신랑인 나를 “이 선생”이라 표현하는 바람에, 친구들이 “군이 아니라 선생이라고? …” 하면서 칭찬인지 야유인지 모를 말을 했다. 아무튼 친구 이광훈(진명여고 교사)이 축의금을 챙겨 건네주자 나는 그 자리에서 빚진 돈을 갚아버렸다. 또다른 친구의 소개로 신혼 전셋집을 거의 아내 돈으로 마련했는데 소유주가 집주인이 아닌 사람의 명의여서 해약을 해야 했다. 그래서 제주도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예전 내 하숙집으로 들어갔다. 참 복잡한 과정이었다.
아내는 애초 마련한 전세보증금에 결혼 부조금을 보태 잠실에 13평짜리 아파트를 마련했다. 입주 첫날 나는 옷가지와 책만을 수레에 싣고 들어왔다. 장모님의 눈치를 보니, 책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노총각이요 글도 쓴다니 조금이라도 돈을 모아두었을 것으로 짐작했다’는 장모님은 동네 노인정에 갈 때면 나이 많은 사위를 자랑할 게 없어서 늘 “우리 사위는 책이 많아”라고 했다. 그나마 텔레비전에 가끔 나오는 사위의 모습을 자랑거리로 삼았다.
첫아들 응일을 낳은 뒤 아내는 키워줄 사람이 없어서 직장을 그만두었다. 10년치 퇴직금을 받아 화곡동 주공아파트 17평짜리로 이사를 갔다. 그곳에는 윤구병·김형윤·천승세·김성동(소설가)·설호정(<샘이깊은물>편집장)과 김철(연세대 교수)·나병식(풀빛출판사) 등이 약속도 하지 않았는데 우연히 모여 살고 있었다. 우리는 자주 어울리면서 유신 말기와 신군부 쿠데타를 함께 겪었다.
얘기를 잠시 거슬러 올라가 보자. 민족문화추진회에서 3년을 근무하자 여러가지 이유로 슬슬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아예 그만두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곳은, 내가 역사를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되는 원전을 접할 기회가 많았고, 번역을 하거나 번역 원고를 고칠 때 원전 이해의 실력을 길러주는 ‘교사’가 되었다. 하지만 한계도 있었다. 한국사를 제대로 공부하려면 역사 이론도 필요하고 자료 탐독과 수집도 필요한데 이런 기본 요건을 충족시킬 수 없었다. 또 여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원전 실력은 높았지만 역사의식이나 현실인식에는 한계를 보이고 있었다. 한국사를 본격으로 공부하기로 마음을 굳힌 나는 새로운 계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유로운 직업을 찾던 나는 ‘프리랜서 글쟁이’로 나서기로 했다.
이이화 역사학자
이이화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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