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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규장각 해제 집필 본격적으로…안병희 교수도 인정 / 이이화

등록 2010-11-23 08:41수정 2010-11-23 08:44

1977년부터 5년 가까이 필자가 서울대 규장각에서 고전 해제 작업을 하던 시절, 규장각 실장을 맡았던 고 안병희(오른쪽·2006년 작고) 교수가 91년 국립국어연구원(현 국립국어원) 초대 원장으로서 개원 현판식을 하고 있다.
1977년부터 5년 가까이 필자가 서울대 규장각에서 고전 해제 작업을 하던 시절, 규장각 실장을 맡았던 고 안병희(오른쪽·2006년 작고) 교수가 91년 국립국어연구원(현 국립국어원) 초대 원장으로서 개원 현판식을 하고 있다.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30
얘기를 다시 거슬러 1968년으로 돌아가 보자. 동아일보사에서 임시직으로 <한국고전백선> 편집 일을 마친 뒤, 나는 고전에 대한 지식을 더 얻고 싶어서 규장각의 해제 집필로 발길을 돌렸다. 마침 소문을 들으니 서울대 도서관에서 규장각 해제 작업을 한다고 했다. 그래서 이종석 형의 알음을 통해 규장각 직원인 이상은씨에게 청탁을 넣어 허락을 받았다. 이씨는 도서관장에게 <한국고전백선>을 보여주고 허락을 받은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해제 쓰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때는 서울대가 동숭동에 있던 시절인데 규장각 관리가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해제 집필은 거의 서울대 사학과나 국문과 대학원생들 또는 강사급들이 도맡아 했다. 솔직하게 말해 이들은 서문조차 제대로 읽을 줄 몰라 일제 때 해놓은 기존의 해제나 국사사전 따위를 참고해 베껴낼 정도였다. 이런 서목(書目)마저 바닥이 난 뒤에는, 목차를 베껴내는 지경이었다.

어느날 사학과 대학원생 부정애가 나를 이리저리 겪어보더니 자주 해제할 책을 들고 와서 서문을 읽어달라거나 내용을 물어보았다. 이게 소문이 나서 서울대 사학과 출신도 아닌 내가 자문 노릇을 맡은 꼴이 되었다.

나는 원고를 많이 쓰고 싶어서 겨울엔 코트 안에 작은 책을 넣고 와서 하숙방에서 해제를 쓰기도 했다. 원고 매수대로 원고료를 어김없이 지불하니 이런 좋은 일이 어디에 있겠나. 이렇게 관리가 허술한 탓으로 책을 유실한 사례도 많았으며 구한말 외교문서 등 중요 문서나 전적들의 한 부분을 칼로 오려 간 것도 많았다. 지금 생각하면 한심스런 일들이었다.

그러다 74년 민족문화추진회(민추)에 들어간 뒤에는 규장각 해제 일을 함께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듬해 서울대가 관악으로 옮긴 뒤에도 해제 작업은 계속되었다. 경제기획원 지원사업이었기 때문이다. 결혼한 뒤 민추를 그만둘 무렵 나는 내심 규장각 해제 집필 작업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래서 민추를 나올 때 사무장인 이계황은 “장가가면 낭인생활을 그만둘 줄 알았는데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며 웃었다.

그 무렵 아내가 마련한 화곡동 주공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한동안 해제 작업에 몰두하며 원고료로 생활하고 있을 때 새로 규장각 실장으로 부임한 서울법대 박병호 교수가 나를 불렀다. 그분은 해제 원고를 책상에 수북하게 쌓아놓고 “이를 어떻게 하지요?”라고 말했다. 내가 쓴 원고를 보고 마음에 든 그가 ‘이 사람이 누구냐’고 묻자 이상은씨가 나를 ‘성대 출신’이라고 했단다. 사실 나는 아버지의 선배인 김창숙 선생의 추천장으로 몇달 동안 성균관대 청강생으로 다닌 적이 있는데 이를 이력서에 ‘성균관대 중퇴’라고 써놓았던 것이다.

박 교수는 “이형 보신탕 먹을 줄 아시오?”라고 물었다. 나는 “네, 네”라고 대답했지만 실은 즐겨 먹지는 않았다. 신림동 어느 보신탕집에서 셋이서 개고기 안주에 소주를 마셨다. 그 자리에서 박 교수는 두 가지를 제의했다. “정부 지원으로 진행하는 사업이라 해제집은 단계마다 책을 내야 하는데 맡을 사람이 없으니 이형이 해주시오. 많이 고쳐야 하는데 이 작업도 알아서 하시오”라고 했다. 나는 서슴없이 하겠다고 대답하며 두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하나는 내가 원고를 뜯어고치더라도 돼먹지 못한 항의를 막아주십시오. 나는 출퇴근을 정시에 할 수 없으니 내가 알아서 하도록 간섭하지 말아 주십시오.”

나는 이렇게 거창한 합의를 했으되 문서 쪼가리 하나 없이 일을 맡았다. 출퇴근은 서울대 통근버스를 이용했다. 내 월급은 비정규직도 아니어서 원고료 지급 형식을 빌렸다. 담당자 유아무개는 사례비를 지급할 때마다 머리를 짰다. 그래도 생활하기에 아주 모자라는 돈은 아니었다.


이이화 역사학자
이이화 역사학자
박 교수가 물러간 뒤 국문학과 안병희 교수가 실장으로 왔다. 처음 그분은 나를 못마땅해하는 것 같았다. 오후에 나오기 일쑤지, 학생들 데리고 술 마시러 다니지, 규장각에 이 사람 저 사람 찾아오면 구내 다방에 가서 노닥거리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사실 내가 규장각에 드나들자, ‘저 사람 어디에서 굴러온 사람이야’라거나 아예 무시하는 듯한 이들도 있었다. 다만 고교 동창인 박남식이 서울대 영문과 교수로 있었는데 가끔 불러서 교수식당에서 점심을 먹기도 했다. 그도 서울대 출신이 아니어서 소외를 받는 처지였다.

어느날 안 실장은 <소학>의 서문을 들고 와서 해석해달라고 부탁했다. 처음에는 나를 시험하려는 것 같아 머뭇거리다가 상세하게 해석해주었다. 그랬더니 반응이 확 달라졌다. 내 실력을 직접 확인한 것이다. 그 뒤부터 안 실장은 내 말을 잘 들어주면서 극진하다 할 정도로 아껴주었다.

이이화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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