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 무렵 서울대 규장각에서 고전 해제 작업을 하며 유신 말기 서울대생들의 민주화 투쟁 과정을 지켜봤다. 사진은 78년 서울대 ‘6·2 데모’ 현장을 보도한 일본 <아사히신문>의 사진.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31
1977년부터 5년 가까이 서울대 규장각에서 내가 주로 한 일은 사학과 전공 교수와 강사급들이 써놓은 해제 원고를 살펴보고 잘못된 내용을 고치는 작업이었다. 예상대로 원고에는 몇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는 국사사전, 한국인명사전 그리고 일제 때의 사전류 등에서 베껴서 원고 장수만 채워놓은 것, 둘째는 저자 이름 다음에 목차만 쭉 베껴놓은 것, 셋째는 저자가 태어난 시기의 왕 이름이나 시대만 적어놓고 내용은 거의 언급하지 않은 것 등이었다. 그나마 전공 교수들이 쓴 원고는 아주 적었으며, 강사급들이 ‘아르바이트’로 쓴 원고들이 대다수였다. 또 학계 원로라는 고려대 이아무개 교수, 충남대 유아무개 교수의 원고마저도 언문투 문장에다가 사전 형식을 전혀 갖추지 않았다.
용돈이 모자라서인지 자주 와서 마구 목차만 베껴놓고 가는 이 교수에게, 한번은 내용 소개와 평가도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그는 목차만 알아도 이용하기에 편하다고 강변하며 못마땅해했다. 대표적인 사이비 학자였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그 첫째 원인은 이들이 한문 원전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둘째는 교열 등 바로잡는 과정이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 원전을 읽지 못하는 전공 학자들은 대부분 일제 때의 일본어 논문을 읽고 베끼는 수준이었다. 무엇보다 서울대가 한국사·한국문학·한국철학 등 한국학 전공 학생들에게도 영어 위주로 시험을 보이고 한문 실력은 거의 평가하지 않는 제도에 가장 큰 원인이 있었다. 한번은 내가 안병희 교수에 이어 규장각 실장으로 온 신아무개 교수에게 이런 문제를 토로한 적이 있다. 그러자 그는 “한국 제일의 서울대에서 이를 하지 못한다면 누가 한단 말이오?”라며 오히려 반감을 드러냈다. 당시 서울대 부총장인 고병익 선생만은 이런 실정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당시 규장각은 서울대 도서관 산하에 있었는데, 행정학과 김운태 교수가 도서관장으로 왔을 때였다. 그분은 내 소문을 들었는지 자신이 쓴 <한국 행정사>와 <한국 근대행정사>를 주면서 교정을 보아달라고 당부했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해주었다. 책은 오자와 오식투성이였고 내용도 거의 일제 때 쓴 논문들을 베껴놓은 것이었다. 이를 알고 안 실장은 대단히 못마땅해했다. 어쨌거나 교정을 해주자 그는 고맙다는 말만 하고 사례는커녕 밥 한 끼 사주지 않았다. 나를 개인 일을 함부로 시켜먹어도 되는 부하 직원처럼 다룬 것이다.
그때 해제 정리 작업을 돕는 석·박사과정 대학원생들이 있었다. 국사학과에서는 권태억(서울대 교수)·박종기(국민대 교수)·박준성(노동운동가) 등이었고, 국문학과에서는 성범중(울산대 교수)·최미정(계명대 교수) 등 6~7명이었다. 나는 이들에게 해제의 의미와 방식을 일러주고 때로는 서문 등 내용을 설명해주고는 원고를 고치게 하거나 거의 새로 쓸 정도로 수정하게 하기도 했다. 나는 때때로 점심시간을 이용해 한문 강독을 하기도 했고, 근무시간이 끝난 뒤 국문과 대학원생인 성범중·심경호 등에게 허균의 문집에서 원문을 골라 강독하기도 했다.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안병욱(가톨릭대 교수)도 당시 국사학과 대학원 과정에 다니면서 규장각에서 논문 준비를 했다. 가끔 해제실에 들러 많은 정보를 알려주었다. 그는 처음에는 나를 ‘정보부 끄나풀’쯤으로 여겨 경계하고 내가 다가가면 눈치를 보면서 입을 다물어버렸다. 하지만 나중엔 나를 겪어보고 소문을 듣기도 해서 자주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나는 학생들과 일이 끝난 뒤에는 영등포로 진출해서 술자리를 함께하기도 했다. 아주 재미있고 유익한 대화 자리였다. 또 우리집에도 가끔 와서 모이기도 했다. 아들 응일이의 돌 때에는 잔치를 벌이지 않았지만 권태억·박종기·성범중 그리고 안병욱 등을 초대해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이들은 어찌 보면 과분할 정도로 나를 인정해주었다고 볼 수 있었다.
그 시절 한참 일을 하다 보면 도서관 앞 계단과 공간에서 학생들이 “유신 철폐”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박정희 정권 반대 집회를 벌였다. 또 학생들은 도서관을 차지하고 농성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학생들은 본부 건물 뒤쪽에 있는 도서관 앞을 ‘아크로폴리스’라고 불렀다. 나는 팔짱을 끼고 어슬렁거리면서 이들의 행사를 지켜보았다. 어느날 친구 황승우의 동생 황지우(시인)가 찾아왔기에 “유신 철폐가 뭐냐? 유신 타도라고 해야지”라고 지적해줬다. ‘철폐’는 피동적, ‘타도’는 능동적 행위를 뜻한다. 우연인지 그 뒤 “유신 타도”라고 쓰인 팻말이 보였다.
이이화 역사학자
이이화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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